01. 프롤로그
“짜잔.”
아내가 눈앞에 기다란 막대기 하나를 내민다. 그곳엔 선명한 두 줄이 새겨져 있다. 결혼 8년 차, 올 것이 왔다. 4년 동안 쉬지 않고 먹었던 엽산도, 3년 전에 끊은 술과 담배도, 주 3일 이상 꾸준히 하던 운동도, 10킬로그램 이상 뺀 살도, 모두 이 순간을 위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은 뭘까.
사실 나는 비혼주의자였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지만, 사실 나는 비혼주의자였다.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 꽃씨처럼 자유분방한 나의 성격은 누군가와 삶을 함께 하기 적합하지 않다 여겼다. 보통 결혼 상대에게 기대하는 책임감이나 참을성 같은 것이 결여된 사람. 호기심에 따라 카메라 리뷰어, 방송국 조연출에서 영어학원 선생님, 연구실 연구원, 체육관 부사범, 컨설턴트, 그리고 기업 인사담당자로 일이 바뀌었다. 어디로 튈지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되는 내게 결혼은 언감생심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괜찮아.
나는 하고 싶은 게 없으니까
오빠는 하고 싶은 걸 하게 해 줄게요.
“괜찮아. 나는 하고 싶은 게 없으니까, 오빠는 하고 싶은 걸 하게 해 줄게요.”
아내와 갓 연애를 시작했을 당시에 아내가 말했다. 우리는 2년 남짓한 시간을 가까운 선후배 사이로 지냈다. 서로의 실패한 연애를 한 차례씩 곁에서 지켜보았던 우리는 서로를 위로해 주다 결국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깨달았다. 그렇구나. 이 사람이 내 연애의 마지막 종착역이구나. 내 나이 스물아홉, 아내의 나이 스물한 살이던 때부터 우리는 사뭇 진지하게, 4년에 걸쳐 우리의 결혼에 관해 이야기했다. 앞으로 살아가게 될 평생의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함께 보낼지에 대해서.
하지만 여전히 나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와 평생을 약속해도 될 만큼 성숙한 사람일까. 내가 혹시 책임지지 못할 성급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이 사람이 나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고 고통받는 삶을 살게 되지는 않을까. 인생의 반려를 만났다는 기쁨에도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가 달라붙었다. 과연 이 사람은, 나와 함께 일생을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런 내게 아내가 말했다. 괜찮다고.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고.
“괜찮아요. 돈은 내가 벌 거야. 나는 그냥 매달 월급이 찍히는 게 좋아요.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나는 일을 그만 둘 생각이 없고, 웬만한 사람보다 훨씬 더 잘할 자신이 있어요.”
숨을 고르고, 아내가 말을 잇는다.
“어려서부터 쭉 일을 했어요.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렵다 보니 첫째인 내가 어떻게든 엄마 아빠를 도와야 했거든요. 나이차가 많이 나는 동생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초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쉰 적이 없어요. 그래서인지 나는 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없어요. 그보다는 뭘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그걸 달성해 나가는 것이 익숙해요. 그렇게 뭔가를 해냈을 때 느끼는 충족감을 먹고살아요. 그래서….”
그래서 나는 하고 싶은 게 없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해요. 내가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하게 해 줄게.
그녀가 말한다.
“나는 당신이 늘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게 좋아요. 꿈을 꾸면서 눈이 반짝거리는 그 모습이.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걸 해요. 나는 그런 당신을 보는 게 좋아요.”
아내의 말을 모두 믿을 만큼 단순하진 않았지만, 아내가 전한 진심은 나약하기만 했던 내게 큰 용기를 주었다. 4년의 연애 뒤, 내 나이 서른둘, 아내 나이 스물넷에, 비혼주의자였던 나는 현실주의자인 아내와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었다.
그래도 넷은 있어야죠
대부분의 사회 초년생이 그러하듯 우리 또한 남 못지않게 부지런히 살았다. 우리는 나름 벌이가 나쁘지 않은 회사에 들어갔고, 안정적으로 결혼생활을 이어나갔다.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우리가 모은 단출한 자금으로 시작해 조촐하기 짝이 없는 생활이었지만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얼굴 구기는 일 한 번 없이 우리는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그래도 넷은 있어야죠.”
어느 날, 저녁밥을 먹다가 아내가 말했다. 아내가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넷이라니. 하나도 낳을까 말까를 고민하던 내게는 너무 엄청난 무게였다. 결혼도 무서워서 벌벌 떨던 개복치 같은 내게 아이라니. 그것도 넷이라니.
아이를 갖는 것은 결혼을 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결혼을 하고 얼마 뒤, 나는 안정적이던 회사를 그만두고 어느 창업 팀에 합류했다. 수입은 들쭉날쭉했고, 반년 넘게 집에 돈을 가져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이 오면 아내와 나는 좀 덜 쓰고 참을 수 있겠지만 아이는 그렇지 못하다. 거의 아내의 수입에 의존해서 버티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생기면 그때는 정말 손가락을 빨며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될 것 같았다. 정말 우리가 아이 넷을 가질 수 있는 형편인지, 그 많은 아이들에게 책임감 있는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는 내게 아내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절충해서 둘로 가자.”
아내의 표정을 보고 깨달았다. 이건 내가 설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내 아내는 반드시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내게 아무것도 요구한 적 없던 이 사람이 내게 원하는 단 한 가지를,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차근차근 아이를 가질 준비를 했다. 나는 오랫동안 피우던 담배를 끊고 엽산을 먹으며 독한 다이어트를 이어나가 10킬로그램을 감량했고, 아내는 군대식 문화로 유명한 회사에서 어떻게든 회식자리의 술을 피하며 새벽마다 운동을 했다. 야근과 주말근무가 일상이 된 상황에서도 우리는 임신과 출산에 필요한 몸을 만들어 나갔다. 회사는 여전히 어려웠고 우리의 경제적 여건이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준비를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언제고 때가 되었을 때, 그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정말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창업팀에 합류한 지 4년이 지나, 나의 호기로웠던 도전이 끝을 맞았다. 대표와 다른 동료들이 가는 길이 내게는 맞지 않았다. 신뢰와 희망을 잃은 나는 팀에 계속 남아있을 수 없었다. 아내에게 동의를 구하고 4년 동안 삶을 갈아 넣었던 회사를 떠났다. 우울감과 패배의식의 늪에서 인생의 바닥을 찍었던 이때의 시간은 또 다른 이야기다.
약간의 공백 기간을 거쳐, 나는 다행히 새로운 회사에 자리를 잡았다. 첫 월급이 들어오던 날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제 더 늦추지 않겠다고. 아내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렇게 우리는 부모가 될 시도를 시작했고, 결국 눈앞에 두 줄이 찍힌 임테기를 마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그림자 속에는 올빼미 한 마리가 숨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정말로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라고.
이 글은 대한민국 전체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철없는 한 남자가, 한 아름다운 아이의 아빠가 되어가는 과정을 기록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