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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으로 임산부가 된 아내

03.

by Kyle Lee

“남편이 나이가 많다더니. 능력자였네?”


산부인과 접수처에 앉아있던 나이 지긋한 간호사가 아내에게 말하며 웃는다. 오호호호호. 산전검사를 한 지 한 달 만에 두 줄이 새겨진 임신테스트기를 들고 찾아온 아내를 반기는 축하 인사다.


세 달 만에 얻은 임테기 두 줄. 건강한 아내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히도, 내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나 보다.


밤을 두려워하던 나의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종마가 되어 합사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우리의 둘째 달 시도 때, 나는 아내에게 솔직한 나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이건 우리가 지금까지 가져왔던 관계와 너무 다른 것 같다고. 아이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지만, 너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건조한 행위 같아서 적응이 되지 않는다고.


아이를 간절히 바라는 아내는 이런 이야기가 불편할 법도 한데, 그녀는 나의 투정 같은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었다. 그 어떤 무시나 왜곡 없이, 아내는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의 두려운 밤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우리의 밤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반드시 계획된 날짜 모두를 채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정해진 날짜에 노력하되 억지 부리지 않았다. 늘 그렇듯 우리 사이에 부담을 만들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의 더 먼 미래를 위한 원칙이었다.


오랜 기간 몸을 만들기 위해 준비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아이를 갖는 것에 부정적이던 나와 아이 넷은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내의 줄다리기가 끝났던 4년 전, 그러니까 아내가 나의 고집을 꺾고 아이를 갖기로(하지만 넷은 아닌 걸로) 합의가 되었던 그때부터 우리는 아이를 언제 가져도 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작했다. 당장 낳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언제 생기더라도 후회나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건강만은 챙기자는 생각이었다. 아내는 술을 완전히 끊고 철분과 엽산을 챙겨 먹으며 일주일에 3일 이상 꾸준히 운동을 지속했고, 나 또한 담배를 끊고 술도 월 1회 이하로 줄였다. 또 매일같이 엽산을 챙기고 꾸준히 운동을 하며 10kg 이상을 감량했다. 장장 4년에 걸친 지속적인 대비 덕분에, 우리는 비교적 손쉽게 임신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아내는 내가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고 말한다


“이번 주 화요일이 생리 예정일인데 아직 기미가 안 보여요.”


목요일까지 소식이 없으면 테스트 한 번 해보려고요. 아내가 말했다. 나는 아내에게, 어쩌면 이번에 아이가 생긴 것 같지 않느냐고 물었다. 요 며칠간 내 몸에 닿는 아내의 체온이 오른 것이 느껴졌다. 평소에 몸이 냉골처럼 찬 사람이, 곁에 누우면 후끈할 정도의 차이였다. 생리 기간이 되면 간혹 이런 경우가 있었지만, 생리를 하기 전 꼭 피부 트러블 한 두 개씩 얼굴에 붙이던 아내의 얼굴이 이번엔 너무도 깨끗하고 뽀송하다. 어쩌면 정말 아이가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자 아내가 말한다.


“지난달에도 생긴 줄 알았었는데 아니었잖아요. 일단 목요일 아침에 확인해 봐요. 그때까지 생리 시작 안 하면.”


아내는 덤덤하게 이야기했고,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목요일 새벽, 한참 출근 준비를 하며 옷을 갈아입고 있던 내게 다가와 아내는 눈앞에 두 줄이 선명하게 새겨진 임신테스트기를 들이밀었다. 짠! 하고 아내가 말한다.


아내는 내가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고 말한다. 정작 나는 그 순간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어렴풋이 내가 웃었던 것 같기는 한데 어떤 감정이었는지, 왜 웃었는지 조차 모르겠다. 기쁨이었을까? 아니면 으레 그래야 한다는 무의식의 발현일까? 뭔가를 느낀 것 같은데, 그 감정의 실체가 낯설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그런 신비로운 감각.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런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 아내가 임신 소식을 알리면, 내 가슴 한구석에서 부푼 풍선처럼 감정이 차올라 라스베이거스의 벨라지오 분수처럼 기쁨이 폭발하는 그런 상상. 그 정도쯤 되어야 아내가 실망하거나 속상하지 않고, 아내가 그토록 원하던 아이가 환영받는 존재임을 느낄 수 있지는 않을까 하고.


하지만 현실의 나는 여전히 그 묘한 떨림의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지 못한다. 이 감정이 기쁨인지, 아니면 두려움인지, 혹은 기대인지.


테스트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니 내일 한 번 더 테스트해 본 후 병원에 가보겠다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를 회사 앞에 내려주고, 나도 사무실로 향하며 멍하니 운전대를 잡았다.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의 한적한 도로 위를 흐르듯이 달리자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답답함. 진짜 임신이라면 여러모로 배려를 받아야 할 시기인데 그럴 수 없다는 불안감. 그리고 누구보다 떨리고 답답하고 흥분과 기대에 차있을, 내가 사랑하는 아내.


아침 7시가 되기 조금 전 사무실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복도를 지나 방에 들어와 의자에 털썩 몸을 던지듯 앉았다. 불도 켜지 않고 멍하니 불 꺼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흐릿하게 나의 얼굴이 비친다.


아내는 이제 엄마가 된다.
그리고 나는...


아이 넷은 있어야죠. 아내가 말한다. 엄마가 되고 싶었던 아내는, 결혼 후 4년 동안 나와의 기나긴 줄다리기를 거치고도, 다시 나의 터무니없는 스타트업 직장생활을 이유로 4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나중에,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아내는 습관처럼 말했다. 만약에, 나중에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하고. 이미 그녀의 세상엔 우리 두 사람을 닮은 작고 소중한 아이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 마음의 세계가 현실로 성큼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이 한 걸음을 옮기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너무 오래 걸려 미안하고, 하지만 함께 걸을 수 있게 됨에 감사하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져왔다. 아내는, 그토록 바라던 엄마가 된다. 그리고 나는, 한 아이의 아빠가 된다.



“아기집 모양도 좋고, 위치도 아주 잘 잡혔대요. 그리고 다음 주에는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대요.”


당신도 같이 갈 거죠? 하고 물으며 아내가 사진 한 장을 건넨다. 아내는 연달아 이틀간 임신 테스트를 했고, 선명한 두 줄이 찍힌 임테기 두 개를 들고 당당히 병원으로 향했다. 난생처음 찍어본 초음파 사진 속에는 텅 빈 작은 타원이 보인다. 그 작은 블랙홀 같은 공간 속에, 보이지 않는 어느 한 생명이 힘을 키우고 있다. 엄청난 힘을 숨기고 기운을 뻗으며, 우리 두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을 존재다.


아기는 1.5밀리 정도의 크기라고 했다며, 아내는 상기된 볼로 연달아 내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덤덤하게 듣고 있던 나는 적절한 타이밍에 추임새를 넣을 뿐, 사실 대단히 감동하거나 마음에 동요가 오지는 않았다. 그저 아이도 아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에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던 걱정이 조금 덜어졌을 뿐.


이제 법적인 임산부가 될 수 있다.


임테기에서 두 줄을 확인하고 병원에 가기까지 나흘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주말이 껴있었고, 아내가 회사일을 빼기 어려운 날도 있었다. 그 나흘 동안 나에게 가장 아쉬웠던 것은 아내가 정식으로 주변의 배려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임신과 출산에 무지한 나라도 임신 초반이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시기라는 것을 안다. 자연 유산되는 경우가 결코 적지 않으며, 대부분의 자연유산은 초기에 이루어진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외관만으로 임산부임을 알아차리기가 어렵고, 그렇기에 누군가의 양보나 배려를 받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더더군다나 임산부 배지도 나오지 않은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임산부 배려석은 그림의 떡이고 회사에 정식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어렵다. 섣불리 회사에 이야기했다가 임신이 아니거나, 임신이어도 뭔가 잘못된 상황이어서 임신을 지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 후폭풍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란 아내의 의견 때문에, 일단 병원에 가서 정밀하게 검사를 받기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묵묵히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그 나흘이, 배려를 받을 수 없는 그 짧은 며칠이 왜 그다지도 길게 느껴졌던지.


배려도 받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시간이 지나 병원에 간 아내는 정식으로 임신 확인증을 발급받았다. 다행히 아내도 배아도 모두 아무 문제가 없다며, 의사는 아내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이후로는 아내의 발 빠른 행보가 인상적이었다. 이미 준비해 둔 것이 많았는지, 아내는 번개처럼 빠르게 여러 가지 행정 절차를 밟아나갔다. 임신지원 서비스를 신청하고, 카드사에 국민행복카드를 신청하며 지원금 바우처를 받았다. 그리고 임산부 스티커를 주문해 당당하게 차에 붙이며 아내가 말했다.


“이거 붙이면 양보 좀 잘해주려나?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니, 그냥 빵빵하는 것만 안 해줘도 고마울 것 같아. 내가 대답했다. 아내는 장장 여덟 종류의 스티커를 모니터에 띄워놓고 한 시간이 넘도록 고민하며 나를 괴롭혔던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아이가 타고 있어요, 임산부가 타고 있어요, 임산부가 운전해요…. 아이가 젖병을 물고 있는 그림과 들고 있는 그림, 임산부가 운전대를 잡은 그림과 임산부의 얼굴만 있는 그림….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봐도 그 차이를 알 수 없었던(혹은 설명을 해줄 때까지 차이를 인지할 수 없었던) 그 스티커들 사이에서 고른 것이 부디 우리의 삶을 조금이나마 안락하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택배 박스가 속속들이 날아들었다. 엽산제, 철분제, 산모수첩, 임산부 배지, 육아 초보 아빠를 위한 가이드북, 국민행복카드 등, 앞으로 우리가 밟아 나가게 될 임신기간의 첫 발을 뗄 지원물품들이었다. 제법 풍성하다는 생각을 하는 내게, 아내는 우리가 사는 곳이 상대적으로 다른 곳보다 출산율이 높아 지원이 적은 편이라고 말해주었다.


4년 동안 공부했어요.


아이를 갖기로 합의를 봤던 4년 전부터, 아내는 임신을 하기 위한 준비뿐만 아니라 임신을 한 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뭘 준비하고 뭘 사야 하며 어디에 돈을 쓰고 어디에서 아껴야 하는지 등을 모두 준비해 왔다고 말했다. 책과 인터넷을 통해 공부하고 엑셀로 임신기간 동안의 계획과 예상 지출 등을 정리해 둔 파일을 열어 내게 보여주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아내가 얼마나 아이를 원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너무 오래 끌어서 원망스럽진 않았어요?”


미안한 마음. 그리고 기다려줘 고마운 그 마음.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내게 부담이 될까 혼자 이토록 많은 준비를 했을 그 마음을, 어쩌면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아내에게 물었다. 내가 마지막까지 시간을 끌며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진 않았느냐고.


“아뇨. 나는 살면서 내 인생에 아이가 당연히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고, 다만 그때가 되었을 때 잘 준비되어 있기를 바랐어요. 당신한테는 미안하지만, 난 단 한 번도 우리가 아이 없이 살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나는 우리가 이렇게 아이를 가지는 순간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아내가 말했다. 내게 생소한 이 모든 과정이 필연적으로 다가올 운명 같은 것임을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을 뿐이라고. 마치 먼 하늘의 번개를 보고 천둥이 울릴 것임을 알고,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아내는 법적으로 임산부가 되었다.


아내는 회사에 단축근무를 신청했고, 여직원 비율이 유난히 높은 아내의 회사에서는 아내의 임신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순수하게 기뻐해 주는 것이 너무도 고마웠다며, 이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이직을 결정한 것이 너무나 잘한 일이었다고. 군대식 문화에 여성 비율은 2% 정도밖에 안 되는 제조업 회사였던 전 직장에서는 아마 골치 아픈 문제 취급이나 안 받으면 다행이었을 거라면서.


아내는 법적으로 임산부가 되었다. 이제는 임산부 배지를 가방에 달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임산부 배려석에 앉을 수 있다.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 붙은 노란색 임산부 스티커는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제법 효과가 좋았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는, 길고도 험난한 예비 부모 생활의 첫 발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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