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의 자해현상에 관해
*죄수의 첫 번 째 의무는 탈옥이다.
표범
-파리 식물원에서
스치는 창살에 지쳐 그의 눈길은
이젠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다.
그에겐 마치 수천의 창살만이 있고
그 뒤엔 아무런 세계도 없는 듯하다.
아주 조그만 원을 만들며 움직이는
사뿐한 듯 힘찬 발걸음의 부드러운 행보는
커다란 의지가 마비되어 서 있는
중심을 따라 도는 힘의 무도와 같다.
가끔씩 눈동자의 장막이 소리 없이
걷히면 형상 하나 그리로 들어가,
사지(四肢)의 긴장된 고요를 뚫고 들어가
심장에 가서는 존재하기를 그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육사가 실수로 퓨마의 집을 잠그지 못했습니다.
동물원 바깥을 배회하던 퓨마는 사람들과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사살 당했습니다.
퓨마는 그가 살던 아프리카 초원을 떠나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없이 대전 동물원에 갇혔습니다. 그래서 동물원이 늘 불편했습니다. 그리고 동물원의 표범들은 학교에 있는 학생들과 오버랩 됩니다.
몇 개월 전 제가 살던 지역의한 학교 학생이 투신했습니다.
소문을 먹고 사는 동네에서 소문은 자기증식없이 소멸했습니다.
피해자 가족의 처지를 염려하는 거 같지만 실은 지역사회의 병리적 상태를 감추려는 방어기제가 교묘하게 작동했습니다. 청소년들 마음의 위험한 생태계를 솔직하게 이야기 하지 않고 학교와 지역사회는 재빠르게 침묵의 카르텔에 동참했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청소년들 사이에서 자해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해 사진이 이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업로드 되고 있습니다. 자해는 ‘나를 봐줘요’ 라는 외침처럼 보이기에 더러는 ‘관종’으로 의미를 축소하기도 합니다. ‘관종’으로 단순화 시키기엔 이 자해의 퍼포먼스가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화 ‘늑대아이’는 늑대인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유키(딸)와 아메(동생)를 키우는 힘쎈(?)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은 야생의 본능으로 가족들을 위한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사냥 나갔다가 사살 당하고 맙니다. 아빠를 닮은 자식들은 늑대와 인간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바람에 엄마는 안전한 시골로 들어갑니다.
이후 뱀과 개구리를 잡던 유키는 학교를 들어가면서 치마를 입기 시작하고 조용한 소녀로 변합니다. 제도와 질서에 순응하라는 착한 아이의 이데올로기에 천방지축 말괄량이 유키가 무릎 끓는 거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그에 비해 동생 아메는 학교 적응이 어렵습니다. 1학년과 2학년 그리고 4학년까지 유키와 아메의 교실을 좌우로 팬하던 카메라는 3학년이 되었던 아메의 교실을 보여줬다가 그리고 다시 3학년 교실로 돌아 온 카메라는 아메가 사라진 빈 교실을 보여줍니다.
아메는 산으로 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결국에 엄마의 간절한 손을 뿌리치고사람보다는 늑대를 선택하고 깊은 숲속으로 들어 갑니다.
늑대와 사람 사이의 친구들을 조련하는 건 학교입니다.그리고 명문대라는 피라미드의 꼭지점을 향해 유치원부터 책상에 앉게 하는 극성스러운 성공의 강박은 너무 일찍부터 야성의 본능을 거세해버립니다. 30명의 아이들을 수용하기에 벅찬 학교의 환경이 작용하긴 하지만 이들의 야성을 연착륙할 수 있는 교육환경이 필요합니다. 현재 1년에 2만 명의 아메같은 친구들이 학교를 떠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탈옥의 의미를 약한 인내심으로 비하하지 말고 우리 친구들이 온종일 거주하는 공간이 상생과 자립을 배워야 하는 본래의 기능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때입니다.
최근 중3친구와 이야기를 나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친구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은 쿠폰을 발행해서 친구들에게 나눠줘야만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다고 합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격을 해야만 따돌림의 순번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는 폭력의 생태계를 그리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서’ 벌이는 자해와 퇴행의 퍼포먼스를 이제 방관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학과 퇴행의 퍼포먼스를 마음의 체력으로 돌려서도 안되고 ‘관종’의 현상으로 취급해서도 안됩니다. 아직도 삶의 주체를 청소년들에게 넘겨주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그들의 죽음과 자해는 이 사회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자기의지와 상관없이 학교로 들어간 친구들에게 신체를 가두지 않는 학습형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서열과 경쟁 중심의 학교에서 상생의 학교로 자녀를 욕망의 대리인으로 취급하는 부모의 태도는 청소년을 삶의 주체로 인정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정치권력에 영향력이 없다는 이유로 선거 공약은 성인 중심의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급급하고 청소년들의 공간은 PC방과 어두운 골목길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답답한 현실에 저항 할 수 있는 표현의 수단을 찾지 못해서 벌이는 청소년들의 끔직한 직설과 은유를 방어하지 말고 정확하게 해석하고 마주봐야 할 때입니다.
*미셀푸코의 <감시와 처벌>애서 인용
*최근에 한 초등학교에서 센터로 생명존중강의 의뢰가 들어왔다. 초등학교까지 자해가 확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