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이 사라지자 카오스가 찾아왔다. 중심에 기대며 살던 이들이, 구심점이 사라지자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심의 그늘에 가려진 것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중심이 비워지면 채워지기 마련인데, 간혹 중심을 놓기 싫은 이들이 있다. 자기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그렇다. 권력에서 노는 이들이 그렇다. 하지만 때로 중심은 괴롭다. 자기 의도와 상관없이 중심이 돼버린 이들은 더 그렇다. 권력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타고난 외모나 배경 혹은 실력 때문에 추종자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대전 과학고 친구들을 만나러 간 적 있는데 학교 교사가 하는 말이 친구들이 활력이 없다고 한다. 그들의 진로는 서울대 아니면 KIST로 이미 정해진 친구들이다. 남들에겐 행복한 고민일지 모르겠지만 다른 곳으로 튈 수 없이 정해진 궤도를 따라가는 청춘들에겐 가혹한 형벌일 수 도 있다. 더 불행한 건 출생순서 때문에 가족의 맏이 되는 경우다. 자기 삶의 꼭짓점이 다른데, 가족 시스템은 끊임없이 장남의 위치를 점검한다. 나는 그 가문의 CCTV밖에 있어서 다행이지만 우리 집의 장남은 고군분투한다. 아직까지 한국의 가족시스템에서 장남은 자기 삶의 보폭을 가지기가 어렵다. 키리시마가 그랬을까? 배구동아리의 에이스로서 그리고 반에서 아님 학교에서 잘 나가는 성골의 역할이 부담스러워 시합을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잠적을 한 걸까? 오직 친구들의 대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키리시마에 관한 정보는 까칠한 엘리트다. 관객들은 전혀 만나보지 못한 키리시마의 존재를 확인하고 시작한다. 후반부에 잠깐 먼발치에서 키리시마로 추정되는 인물이 옥상에 잠깐 앉아 있다가 사라진다. 그는 정말로 존재하고 있을까?
응시의 무게와 어긋나는 응시 그리고 평등한 응시
영화 초반 금요일이 네 번 반복한다. 그리고 마지막 날인 화요일은 두 번 반복한다. 초반의 금요일의 반복은 ‘키리시마’의 중심에 가려진 이들을 섬세하게 양지로 끌어내는 시퀀스다. 그리고 서열과 권력으로 나누어진 학교의 내부를 보여준다.
영화 동아리 마에다(왼쪽)과 부원
학교도 사회처럼 엄연히 계층이 존재한다. 공부와 외모가 출중한 성골과 1% 모자라지만 그럭저럭 성골의 총애를 받는 진골, 그리고 존재감 없는 그 밖의 6두품 이하 그룹. 영화동아리방은 검도부 동아리의 한쪽 구석에 있는 골방이다. 6두품 이들에겐 키리시마가 사라지건 말 건 상관없다. 존재의 중심에서 밀려났으니 중심과 상관없이 논다. 그들에겐 키리시마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고 영화 동아리 교사가 강요하는 뻔한 시나리오를 배반하고 신속하게 좀비영화를 찍는 게 급선무다. 그래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좀비’는 이들의 페르소나다. 동아리 교사가 원하는 학생다운 제목 '그대여 눈물을 닦아줘요'가 아닌 그들이 정한 제목은 '학생회의 죽음'이다. 그들을 찬밥처럼 밀어내는 세상에 응전하는 도구는 카메라와 은유다. 영화 후반 판타지 씬에는 좀비들이 진골 그룹을 물어뜯는다. ‘좀비’는 B급 무비의 단골 소재다. B무비는 할리우드 산업의 메이저에서 벗어나 적은 예산으로 다양한 상업 장르를 시도할 수 있었다. '문을 닫을 때 영화의 세트가 흔들리면 B무비다'라고 할 정도로 허름한 세트와 조명으로 만든 영화들이었지만 흥행 부담이 덜한 덕에 감독의 독특한 스타일을 새겨 넣을 수 있었다.
6두품 이하 그룹은 키리시마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덕분(?)에 이미 낙오자로 출발한 이들이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은 낙오자야말로 시선의 감옥에 사는 성골과 진골에 비해 훨씬 자유롭다. 하지만 권력에 대한 욕망을 잠시 유보한 것뿐이지 권력의 의자에 앉게 되면 그들도 성골을 닮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공감과 연대의 정신보다는 성공과 경쟁의 꼭짓점에 오르는 법을 배웠다. 을들에 대한 갑질은 당연하게 여겼다. 다행히 세상의 시선이 바뀌어 갑질이 욕먹는 세상이 되었지만 한 때는 당연했다. 그래서 갑을이 수시로 교차하고, 왕따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학교는 정글이 되었다. 마에다와 영화 동아리는 있지만 없는 존재들이다. 아무도 그들을 보지 않는 응시의 부재만 존재한다. 그래서 비밀대화를 하다가 이들을 마주쳐도 반응하는 대사는 “상관없어”다. 진골의 카즈미도 잠깐 게토 안에 사는 마에다에게 관심을 가지지만 감히 성골과 진골의 응시를 견뎌낼 수 없어 바로 철수한다.
키리시마 대타 코이즈미(사진 왼쪽)
영화는 수많은 응시와 시선이 어긋나고 집중한다. 학교는 수많은 응시와 시선을 버텨내고 수용하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성골 키리시마는 가장 많은 응시의 대상이다. 시나는 히로키를 응시하고 관악부 부장 사 와지마도 히로키를 응시한다. 시나는 히로키의 앞에 앉아 있고 사 와지마는 히로키의 뒤에 앉아 있다. 히로키를 선점한 이는 진골그룹의 시나다. 하지만 소극적인 사 와지마가 할 수 있는 건 앞에 앉은 히로키와 함께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이다. 카메라는 친절하게 한 프레임 안에 둘을 가둬 논다. 키리시마를 응시하는 리사는 응시의 대상이 부재하는 바람에 친구들에게 까칠하게 군다.
미카는 배구부의 리베로인 코이즈미를 응시한다. 그리고 카즈미를 응시한다. 둘을 응시하는 내용은 다르다. 원래 리베로였던 키리시마가 빠지는 바람에 후보였던 코이즈미가 리베로 역할을 하지만 팀은 패배하고 코이즈미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배구선수다. 미카보다 팔뚝도 단단하고 배드민턴도 잘하는 카즈미에 대한 응시는 부러움의 응시고 코이즈미는 동병상련의 응시다. 응시는 조응되지 않고 어긋나기도 한다. 혹은 응시를 눈치채지 못한다. 자기를 응시하기 힘든 히로키에게 타인의 응시는 버겁다. 마지막 장면 마에다가 8미리 카메라로 히로키의 몸을 훑고 얼굴로 클로즈업하면서 ‘멋있다’라고 할 때 히로키는 감당을 하지 못하고 울먹거린다. 히로키는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성골과 다름없는 친구다.
영화 동아리 마에다와 사 와지마와 리베로 코이즈미는 아무도 응시하지 않는 이들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응시하는 건 카메라다. <키리시마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는 구심점이 주인공인 고전영화의 전통에서 벗어난 영화다. 엑스트라거나 조연에 머물러 있어 카메라의 응시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이들을 오지랖 넓게 껴안고 간다. 비록 다 껴안고 갈 수 없지만 키리시마를 프레임 밖으로 밀어내고 학교의 내부를 평등하게 바라보는 응시는 주인공을 구심점으로 돌아가는 합리주의의 배반처럼 보인다.
울먹이는 히로키
나는 타인의 조합이다.
라캉의 이 문장은 영화 비평의 세계에서 유령처럼 자주 출몰했다. 라캉의 잦은 인용이 궁금했는데 나중에 알게 되었다. 영화 캐릭터와 내러티브 구축에 라캉은 필수 조건이었다. 또한 예술의 궁극적 주제가 자기 탐구의 발현 아니던가? 주체를 찾아가는 과정은 영화의 핵심이다. 청소년은 수많은 타인과 만남을 통해 자아를 선택하는 과정이다. 학교는 자아의 형성을 도와주기 위해 다양한 세계를 만나게 하고 네트워크를 제공한다. 학교의 본질인데 현실은 입시와 명문대라는 획일적인 이미지를 주입하는 바람에 타인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은 왜곡되고 말았다. 이 결과로 공감능력이 부재한 채 상류층이 되어 서민을 개 돼지로 묘사하는 괴물이 되어 버렸고임대 아파트와 고급 아파트가 계급의 기준이 되었다. 교실은 평수로 나누어지고 계급을 강조하는 부모의 그늘에 자라는 아이들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키리시마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를 지배하는 톤은 숙명론이다. 배드민턴을 치기 위해 준비하던 미카는 카즈미의 팔뚝을 만지면서 ‘이래서 스매쉬가 강하구나. 타고나는 건 역시 있나 봐’라고 중얼거린다. ‘카스미는 이런 내 맘을 모를 거야’ 다시 라커룸에서 만난 미카와 카즈미의 대화장면은 거울 속에 있는 카즈미와 거울 밖의 미카로 분리된다. 미카는 거울 속의 카스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기에 마주 보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 미카가 할 수 있는 건 ‘하루라도 쉬면 왠지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오로지 연습뿐이다. 미카의 마음을 안쓰럽게 하는 리베로 코이즈미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게 다야’라고 절규한다. 우월한 DNA를 가진 키리시마의 영향력은 심지어 키리시마 못지않은 능력을 가진 히로키 마저 ‘난 놈은 뭐든 되고 모자란 놈은 결국 안된다는 말이잖아’라며 중얼거린다.
부의 대물림과 속도와 경쟁의 신자유주의는 청춘들에게 도전보다는 체념을 선택하게 했다.
엘리트 키리시마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 있는 진골 그룹은 가장 타자화 된 이들에 속한다. 진로 조사서를 받은 류타는 엄마에게 맡긴다고 말하고 함께 대학교를 가자고 한다. 히로키는 한때 야구를 좋아하고 잘하지만 자신이 없어 나왔다. 그가 메고 다니는 야구가방은 불확실한 청춘의 은유처럼 보인다. 우연히 마주치는 야구부 주장을 멀리서 바라보거나 심지어 피하기까지 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운동장에서 야구하는 장면을 배경으로 키리시마에게 전화를 걸면서 끝난다.
고전영화 방식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조화롭게 운행되었다면, 모더니즘은 이 중심을 일부러 배제하기도 한다. 혹은 중심이 사라진 세계를 다루기도 한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의 영화 ‘정사’에서는 주인공급의 여배우가 30분 정도 나오다가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진다. 중심이 서서히 분배되고 개별화된다.모두가 중심이 된다. 주인공 히로키로 마무리하는 영화는 완벽한 해체 방식은 아니지만 적어도 해체의 시도를 시도한 영화다.
모든 영화는 성장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 타자로 머물던 주인공이 주체로 돌아가는 과정을담는다. 반면에 성장의 서사를 배반하는 영화가 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같은 몇몇의 작가주의 감독들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 대부분은 성장의 궤적을 볼 수가 없다. 영화를 계몽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꼰대들에 대한 통쾌한 배반이다. 심지어 영화 <마스터>는 성장이 아니라 퇴행한다. 성장의 화려한 서사가 기본 골격인 대중영화의 화법은 뻔한 성장영화로 가득하다. 특히 할리우드식 해피엔딩은 성공의 강박을 보여주는 닫힌 마무리 방식으로 일관한다. 영화 <나의 파바로티>는 게으른 천재가 스승을 만나 재능을 발견하고 성공하는 공식을 따른다. 실화를 소재로 하면 금상첨화다. 게다가 아카데미 작품상의 후보 자격이 되거나 수상작이 된다. <1917>과 <그린 북>그리고 <스폿 라이트>까지 다양하다. 대중영화의 자아 찾기 과정이 오염되어 있는 바람에 제작자와 감독의 계몽을 받아 적는 수동적인 관객을 양산한다. 그래서 영화의 인물들은 가짜 주체로 환원되고 관객들은 점점 타자화 되었다.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는 요란하게 성장하는 인물들이 아니고 조금씩 어긋나면서 자아를 두리번거리면서 찾아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영화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래서 좀 더 타인의 응시에서 자유로운 영화동아리 친구들에게 시선이 향한다. 비록 불평등이 구조화된 현실이지만 이들에겐 체념보다는 소신을 밀고 나가는 뚝심이 있다. “싸우자 이곳이 우리들의 세계다, 우리들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만 하니까” 영화 동아리가 찍고 있는 좀비 영화 속의 대사는 뭉클하다. 비록 좀비지만 각자도생이 대안이라는 냉혹한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우리’를 잊지 않고 함께 가자는 단호함이 보인다. <키리시마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가 의식의 성장을 다뤘다면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후속작 <종이달>은 욕망의 성장을 다뤘다. 주부로 조용한 삶을 살던 주인공 리카가 돈과 젊은 남자를 만나면서 욕망의 질주를 보여주는 영화다. 그리고 욕망에 대한 집착은 파멸이 아니라 욕망을 끝까지 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 욕망영화의 공식을 통쾌하게 박살 냈다. (영화 후반분 리카가 유리창을 박살 내는 장면은 이 영화가 의도한 통쾌한은유다)
그날 이후 세상은 무너졌다.
배구동아리의 에이스 키리시마가 동아리를 마칠 때까지 친구들은 농구를 하면서 기다린다. 이날 키리시마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한 친구가 의문을 제기한다. “저기 말이야,키리시마도 없는데 왜 농구를 하고 있는 거지?” 이날부터 서서히 균열이 시작된다. 키리시마가 사라진 4박 5일간의 균열을 기록한 영화. 틈은 혼란의 증거가 아니라 부화의 증거다. 틈이 벌어지는 순간에, 카즈미는 독설을 날리는 시나의 뺨을 때린다. 미카도 막말하는 시나의 뺨을 때리려던 참이었다. 시선과 권력으로 얽혀 있던 가짜 관계의 파열음이 생기는 순간이다. 정략적인 계약 관계는 잠시 해약의 위기를 겪는다. 그리고 히로키를 응시하는 카메라는 가끔씩 오래 머물며 천천히 다가가고 키리시마는 태업을 선언한다. 줄탁동시의 시간이다. 틈이 벌어지는 순간의 진통은 잘 정리되면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성장기에는 어딘가에 기대면서 자라지만 건강한 자기 분열과 분리과정이 없이 버팀목에 오랫동안 기대게 되면 고정관념이 되고 성격이 되고 오히려 독이 된다.
키리시마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일종의 맥거핀일지 모른다. 마치 기표의 형태인 경전으로 남아 부재가 존재를 지배하는 형이상학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습관처럼 농구를 하며 키리시마를 기다렸던 친구들은 키리시마의 부재가 두렵다. 그들은 키리시마가 없는 이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오지 않을 키리시마를 기다리는 시간은 주인의 문을 열고 나간 노예가 닫힌 문 앞에서 서성대는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다.
*내가 누구인지 나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리어왕'에서 인용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프랑스 구전, 개와 늑대가 분간이 가지 않는 황혼 녘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