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저 고개를 넘어 왔다. 자전거 여행의 마지막은 야트막한 언덕도 대관령의 아우라를 가진다. 악을 쓰면서 올라왔다. 군대나 혹은 성공을 강조하는 조직에서 정신무장을 강조할 때 요구하는 주문이다. 그래서 한국의 축구는 기술보다는 정신무장을 강조한다. 지금은 기술쪽도 좋아지고 있지만.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다'는 평소 내 명함에 새기고 다니는 문장이다. 불현듯 자전거를 타고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치고 올라 오면서, 고개 정상을 통과하기 위해 쉬지 않고 페달을 구르는 나를 보면서, 누구도 강요하지 않고 목표 혹은 성공에 대해 온전히 몰입하는 내 모습이 보여 신기했다. 경쟁의 방식이 힘든 나에게 이 정도의 몰입이라면 경쟁을 허용해도 괜찮지 않은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나만의 보폭대로 가는 방식이라면 좋다.
영화 '위 플래쉬'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음악교사 플래처가 일부 학부모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인종차별 발언을 서슴지 않고 능력이 없는 학생들한테 드럼의 심벌즈를 던지기도 한다. 제자들을 끽 소리 못하게하는 플래처의 신공이 부러웠던 게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조차 플래처의 뛰어난 조련술(교육법)로 오해를 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예전만큼 강력하지 않은 학교와 교사의 권위가 그리워서였을 거다. 이 영화는 우리들이 익숙하게 보아왔던 교사와 제자의 눈물겨운 실랑이 끝에 제자가 사람된다는 식의 성공 드라마는 아니다. 둘 다 자기만의 욕망을 질주할 뿐이다. 물론 마지막 드럼연주에 몰입한 앤드류와 플래처 사이의 교감 장면이 화해를 암시하긴 하지만 플래처에게 욕망의 마침표가 없어서 화해는 잠깐의 허니문이다. 끝을 알수 없는 아름다움의 꼭지점을 위해 제자들에게 채찍질을 플래처의 태도가 내게는 불편했다. (영화 ‘서편제’의 유봉이 소리의 완성을 위해 송화의 눈을 멀게 했다.)
그동안 인간의 역사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한번도 사람이 먼저 인 적이 없었다.
고대 사회는 귀족이 먼저였고 중세는 종교가 초기 자본주의엔 국가가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먼저였다. 자녀의 자유보다는 부모의 욕망이 먼저고 복지시설의 휠체어보다는 원장 가족들의 욕망이 먼저고 삼성은 노동조합의 결성보다는 이건희의 무노조 경영 이념이 먼저였다. 노동자의 손목보다는 기계가, 그리고 자식 농사 때문에 손바닥만 땅 한마지기에 목 매다는 농부의 간절함보다는 현대자동차 한대를 팔아 먹기 위한 FTA가 먼저였고, 보행자보다는 자동차가, 학교는 학생들의 자괴감보다는 명문대 합격을 자랑하는 플래카드가 먼저고, 세월호에 갇힌 어린 꽃들의 비명보다는 선장과 기관사와 해양경찰의 안위가, 그리고 세월호 타령이 보기 힘든 국민들은 마르지 않은 유족들의 눈물보다는 위정자의 심기를 위해 모든 권력기관이 육탄방어를 했다.
시민혁명이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분기점이 되었지만 여성의 참정권이 제한되고 노예무역이 존재하는 절름발이 혁명이었다. 2016의 촛불 혁명은 비로소 우리나라도 사람이 먼저인 시대를 여는 첫걸음처럼 보였다. 이즈음 나온 영화 ‘1987’은 수천년 동안 계급의 피리미드 밑바닥에서 버티었던 인간의 역사를 위로하는 영화였고 촛불혁명에 바치는 찬사였다. 그리고 최근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기울어진 젠더 지형을 더 꼼꼼하게 되짚어보자고 격려하는 영화였다. 그래서 두 영화를 보면서 절반은 울면서 볼 수 밖에 없었다. 그 눈물은 감격의 눈물이었다.
이제 사람이 먼저인 시대가 시작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