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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시스 Oct 21. 2024

평범한 악의 얼굴

“아름답고 추악한 하루다”

                --영화 속 대사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가 칸느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후 말들이 많았다. 카메라의 무심한 시선이 비윤리적이었다는 반응과 뻔한 윤리적인 판단보다는 차라리 풍경의 묘사가 더 어울렸다는 반응. *‘콜롬바인 총기 난사 사건’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면 하품을 하거나 졸았을 거다. 서사에 매달리기보다는 아이들을 따라다니는 카메라의 롱테이크와 비직업 배우를 쓰고 끝맺음이 없는 열린 결말, 촬영 감독도 비극을 예감한 듯 까치발 걸음으로 이들의 뒤를 조심조심 밟는다. 불행은 요란스럽게 전조가 있는 게 아니다. 눈부시게 맑은 가을 하늘, 아이러니하게도 마른 빨래처럼 눅눅한 마음들이 뽀송뽀송 마를 것만 같은 그런 날 찾아온다. 

    * 콜롬바인 참사 원인에 대해 전문가들은 헤비메탈과 폭력 영화. 사우스 파크. 비디오 게임. 마약. 마릴린 맨슨의 책임으로 돌렸다. 콜럼바인 참사의 주역인 에릭과 딜란의 집에서 록가수 마릴린 맨슨의 CD가 발견됐다는 이유 때문이다. 사건을 수사 중인 ‘스티브 데이비스’ 보안관은“걔들이 그날 아침 볼링을 했대요. 그거밖엔 몰라요!” 총이 불티나게 팔리는 곳 미시간. 얼마 후 참혹한 총격사건이 또 하나 터졌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학교에 총을 들고 와서 같은 반 여자아이를 쏜 것이다. 비극이 발생 한 날 아침 볼링을 했다는 사실에 포착해서 만든 마이클 무어의 다큐 <볼링 포 콜롬바인>은 감독은 타인에 대한 공포와 적대를 생산하는 미국의 국내외 정책이 사건의 진짜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은 1953년 이란의 모사디크 정권을 전복시키고 독재자의 집권을 도운 것을 시작으로, 과테말라(1954), 베트남(1963), 칠레(1973), 살바도르(1977), 니카라과(1981), 이라크(1982), 이란(1983), 파나마(1989), 이라크(1991), 수단(1998), 그리고 탈레반(2000-2001)에 군사적 공격을 가했다. 아울러 자국에서는 원주민 인디언을 학살하고 핏자국이 얼룩진 땅 위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깃발을 꽂았다. 

     아서 팬 감독의 <작은 거인>은 영화 정보 없이 봤다가 깜짝 놀란 영화다. 인디언을 주제로 한 영화는 <늑대와 춤을>과 <라스트 모히칸>이 있었지만 인디언이 주체가 아니라 이방인의 관점에서 서술한 인디언 이야기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작은 거인>은 서부 기병대가 몰살당한 ‘리틀 빅혼’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한 즈음의 인디언 수난사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리틀 빅혼’ 전투까지 다루지만 이후 ‘운디드니 인디언 대학살’로 인디언들에 존경받는 추장 ‘큰발’ 과 ‘크레이지 호스’ 가 살해를 당한다. ‘크레이지 호스’는 미국 대통령 흉상이 세워진 맞은 편에 세워지고 있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두오’ 책을 읽기도 하고 인디언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내게 ‘작은 거인’은 미국 인디언 보호구역을 찾아가고 싶게 하는 강력한 자극제였다. 

 약육강식 시대의 서부 영화처럼 무장하지 않으면 당하고 만다는 불안. 그 불안이 집집마다 총을 품게 하고 어디서나 쉽게 총을 구할 수 있게 했다. 경악스러웠던 건 이들이 총기 박람회에 가서 총을 구매했다는 거다. 미국은 아직도 1년에 300명이 총기사고의 희생양이 되고 있지만 강력한 로비 단체인 총기협회를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감독이 캐나다의 가정집을 방문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보통 미국 가정집이라면 소지하고 있는 총을 가지고 침입자를 향해 겨눌 텐데 캐나다는 정반대였다. 

 베토벤의 ‘월광’이 폭풍 전야의 학교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학생들은 평소처럼 배식 반찬 때문에 투덜대고, 살찌는 게 두려워 화장실에 가서 토를 하고, 왕따 친구를 괴롭히고, 농구를 하고, 사진을 찍는다. 아주 평범한 하루, 아주 평범한 하루를 경악하게 만드는 건조한 총소리. 공동체 역할을 하는 학교가,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야 할 학교가 오히려 공동체를 혐오하게 하는 효과를 준다. 끊임없는 경쟁, 자괴감, 느끼한 눈빛. 감싸 안고 다독거리기보다는 밀어내거나 비웃는, 학교에 들어갈 준비가 안 된 아이들이 억지로 들어가면서 비극이 준비된다. 이 억지스러움이 친구를 증오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지워 버리게 한다. 미국에서 학교를 배경으로 서부 활극이 종종 일어나는 건 이유가 없는 게 아니다. 그리고 아주 평범한 하루는 누군가에게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아주 특별한 하루 일런지 모른다.    

*콜롬바인 총격 사건

1999년 4월 20일, 미국 콜로라도주 콜롬바인의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교내 총격과 폭탄테러 미수 사건. 12학년(한국 기준 고3) 학생인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레볼드가 학생 12명과 교사 1명, 총 13명을 사살하였다. 대부분 학생이 학교 도서관에서 살해되었으며, 그 후 그 둘은 자살했다. 총격으로 21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경찰과 총격도 오갔다. 또 다른 3명은 학교를 탈출하려다 다치었다. 1999년 당시 미국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학교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이 범죄는 여러 예비 범죄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콜롬바인'은 집단 총격의 대명사가 되었다.                                              <나무위키에서 인용>     

영화 <엘리펀트>를 보고 나치전범 아이히만’이 떠올랐다. 유대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을 관람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은 유대인 절멸을 기획하고 교사한 사람들곧 히틀러를 정점으로 한 나치 지도부의 명령을 받은 처지에 있었던 사람이다그는 나치당의 강령도 알지 못했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도 읽지 않았다그의 직급은 나치 친위대의 중간관리자(중령급)에 지나지 않았다히틀러는 그를 대면할 기회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며설령 대면했다 해도 아이히만의 이름은커녕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법을 준수하는 건실한 시민이었던 아이히만은 명령받은 일을 이행하는 것을 의무라고 느꼈고유대인 전문가로서 그들을 수용소에 배분하는 일을 착실히 수행했다. (중략아이히만은 난데없이 나타난 악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규칙과 명령과 주어진 이상에 맞추려고   노력한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었다.’‘의 평범함’은 우리 일상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성실한 아저씨 ‘아이히만’을 보고 만든 용어다. 생각을 멈추면 누구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나무보다는 숲을 보라는 메시지는 홀로코스트의 아픔이 지워지지 않은 유태인들에겐 불편한 진실이었다. 더구나 유태인 가스실에 일했던 부역자 중에 유태인들도 한몫했다는, 팩트체크까지 하는 바람에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의 과녁판이 되었고 비자발적으로 격리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출판할 당시의 기록이다. 홀로코스트의 아픔을 위로하는 영화도 필요하지만 홀로코스트의 재현을 막을 수 있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히틀러가 역사의 교훈이 되지 않았다. 1964년 인도네시아 공산당원 100만 명 학살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와 중국의 문화대혁명, 5.18 민주화운동, 보스니아 내전과 최근 미얀마의 로힝야까지 사유하지 않는 인간을 양육하는 사회에서 홀로코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의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콜롬바인 고등학교의 가해자였던 ‘딜런 클리볼드’의 어머니 ‘수잔 클리볼드’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17년 이후 ‘나는 가해자의 어머니입니다’란 제목을 책을 냈다. 수잔의 평범한 행복은 1999년 4월 20일 이후 무너져버렸다. 다른 모든 평범한 엄마들처럼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세상에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라고 가르쳤다어릴 때부터 아이 돌보는 아르바이트를 했으며대학에서는 아동 발달과 아동심리를 전공했고직장에서는 아이들과 어른들을 가르치는 일을 오래 했다그래서 자신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햇살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여느 아이처럼 밝고 맑은 아들 ‘딜런 클리볼드’가 ‘에드 해리스’와 함께 학교에 들어가 서바이벌 게임처럼 총을 난사해 교사와 학생 포함 13명은 그들의 표적이 되었다. 갑자기 가해자가 되어 버린 수잔에게 차가워진 현실의 묘사는 책을 읽는 내내 뭉클하게 한다. 수잔의 궁금증은 ‘왜?’였다. 

 영화<케빈에 대하여>의 케빈은 ‘딜런 클리볼드’처럼 햇살은 아니었고 엄마 에바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아들이었다. 결국 케빈은 평소 사이좋았던 아버지(정략적인 친절이었다)와 여동생 그리고 학교에 가서 몇 명의 아이들을 석궁으로 죽인다. 수잔의 심리적인 죄책감과 비난은 에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에바도 수잔처럼 케빈의 행동이 궁금했다. 결국 2년이 지난 후 케빈의 생일날 소년원을 찾아가서 케빈에게 묻는다. ‘왜? 이제는 말할 때가 되지 않았니?’‘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어’ 케빈의 대답이다. 모호한 대답 때문에 역시? 소시오패스로 분석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일탈의 절정기에는 누구도 자기분석이 어렵다. 대답이 끝난 후 케빈과 에바는 이제껏 하지 못한 포옹으로 마무리한다. 감독의 대답이자 엄마 에바가     답을 확인하는 쇼트다.                                       

그리고 수잔도 ‘왜?’에 대한 나름의 답을 읊조린다.

‘모든 게 정상적으로 보일 때도 뭔가 심각하게, 심각하게 잘못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 

 부모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 특히 신념이 강한 부모들의 경우 이중성을 보이는 자녀들이 많다. ‘부모들은 나를 착한 아이로 알고 있을 거’라는 말을 종종 듣는 경우가 있었다. 자녀들과 대화의 눈높이가 안 맞는 경우 행복한 착각은 진행형이고 제2의 수잔 클리볼드의 고백은 또 다른 곳에서 나올 것이다. 소시오패스는 없다. 더 이상 소시오패스에게 사회의 역기능에 대한 책임을 돌리지 말자. 

그리고 소시오패스를 소재로 관객과 시청자를 꾀려는 영상 미디어의 선정성이 도를 넘고 있다. 이제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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