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릴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기형도의 ‘엄마 걱정’ 일부
엄마가 오지 않는다. 아니 아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동생 교쿄는 가끔씩 한나절을 옷장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기특한 동생들 유키코와 시게루. 특히 개구쟁이 시게루는 장난치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는 엄마의 부탁에 아직까지 말썽 없이 잘 지낸다. 우리 4남매를 집 주인이 발견하는 날엔 우린 다시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야한다. 그들도 조용히 지낼 권리가 있다고 하니까 굳이 할말은 없다. 그나저나 걱정이다. 엄마가 주신 생활비가 얼마 남지 않았다. 어린 동생들의 배다른 아버지들을 찾아다니면서 생활비를 타는 것도 쉽지 많은 않다.
하지만 어젯밤 시게루가 누워서 무언가 씹어 먹는 소리를 내길래 뱉어 보라고 했더니 종이였다. 염소새끼도 아니고, 오늘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한테 삼각김밥이나 받아 와야겠다. 그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비록 날짜가 지난 김밥이지만 짠돌이 주인 눈치 보면서 몰래 몰래 건네준다.
나는 수심에 가득 차 있는 영화 속의 주인공 아키라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를 본다. 아침만 먹고 점심을 거른 채 부지런히 달려온 나의 위장도 배고프다고 아우성이다. 저금통을 털털 털어서 사온 컵라면을 먹는 4남매 곁에서 국물이라도 얻어먹고 싶은 심정이다. 아키라만 아니라 동생들도 애인한테 가버린 엄마를 원망하지 않고 침착하게 잘 기다린다. 이미 잘 훈련 받아 온 짐승처럼, 투정 한번 부리지 않고, 비인간적일 정도로 배고픔을 외로움을 잔인하리 만치 견뎌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 카메라의 시선은 대단한 평정심을 보여준다. 그리고 감정을 벌릴 틈도 보이지 않고 밀고 나가는 감독의 용병술은 차갑게 보일 정도다. 느린 화면 밖에서 얌전하게 쳐다보고 있는 우리 또한 무심한 방관자처럼 보인다. 어느새 우리는 공범자가 돼 버렸다. 영화가 시작 되고 얼마 되지 않아 같이 보던 여자 회원은 훌쩍거리기 시작해서 영화가 끝나서야 눈물을 그친다. 비가 내리는 오늘 그녀의 신발과 바지 그리고 얼굴도 젖어 있다. 최대한 신파를 경계하고 얄팍하게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도는 성공했다.
이런 소재가 우리나라에 왔으면 어떤 식으로 포장 될까? 끔찍한 상상을 하면서 영화를 봤다. 주인공의 불행을 강조하면서 눈물샘이 바닥이 날 때까지 관객들을 괴롭히는 신통한 기술을 가진 우리나라의 감독. 둘 중 누가 더 잔인한가? 영화 <7번 방의 선물>을 비교해봐라. 나쁜 영화는 없다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나쁜 영화는 있다. 특히 <7번 방의 선물>은 캐릭터의 묘사나 카메라의 거리를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하는 영화다. 인간 관계에서 상대방을 비즈니스의 대상으로 이용할 때 기만적이라 하듯이 <7번 방의 선물>의 주인공들은 영화 산업 비즈니스의 대상물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린 시절의 가을 날. 엄마는 가을 운동회에 장사로 사용 할 옥수수를 사러 가까운 마을로 가는 중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엄마를 쫓아간다고 난리를 피웠고 결국엔 동네 누나들이 사지를 붙들고 말린다. 비와 눈물이 범벅이 되었던, 지금은 어슴푸레 희미해진 기억을 어린 4남매랑 비교하면 내가 이상한 걸까? 이들이 대단한 걸까?
어린 시절의 어머니는 거의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던가? 영화를 보고 난 후 아이를 낳고 싶었다는 섣부른 소망을 어느 회원이 자책한다. 책임이란 얼마나 위대한가?
이들 4남매들은 결코 울지 않는다. 다만 참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참을성이 표현 할 수 있는 어떤 형식을 만난다면 그 형식은 행복이 될지 불행이 될지 누구도 장담 못한다.
‘찬밥처럼 방에 담겨’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슬픔 너무 오래되면 독이 돼 버린다. 그리고 그 독이 우리들의 무관심을 위협하는 칼날이 될는지 모를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