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지구 상에서 전쟁이 사라진 적은 단 순간도 없다. 유래 없는 코로나 펜데믹도 전쟁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홍콩, 미얀마,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우크라이나까지 지금도 전쟁은 한참 진행 중이다. 전쟁은 군대와 안보의 영역만이 아니라 '모두의 전쟁'일 수밖에 없다. 어떤 전쟁 상황에서도 여성과 아동은 가장 취약한 피해자가 된다. 그동안 많은 여성들이 참전하여 직접 전쟁을 겪어냈지만, 승리한 전쟁이든 패배한 전쟁이든 전쟁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남성의 얼굴을 하고, 남성의 목소리만 담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2022년, 아키비스트의 서재에 소개하는 첫 번째 테마는 전쟁에 대한 여성들의 기록이다.
2017년 아카이브 세미나에서 처음 만난 책이다. 아키비스트 교육과정을 진행할 때마다 교육생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있다. 일반 인문교양서로는 보기 드물게 두껍지만, 그 두께만큼 읽는 재미가 두툼하다.
전쟁의 역사는 곧 남성의 역사로 간주된다. 남성성이 '전쟁'을 상징하는 반면, 여성성은 '평화'를 상징하는 방식으로 성별화 되어 있다. 그러나 여성은 전쟁의 희생자인 동시에 전쟁의 참전자이자 협력자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여자가 군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4세기부터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그리스 군대에서 여자들이 싸웠으며,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에서도 참가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여성 참전자는 영국군 22만 5천 명, 미국군 45~50만 명, 독일군 50만 명이었다. 소비에트 군대에서는 백만 명가량의 여성들이 참전해 싸웠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소비에트 연합이 치른 전쟁에 참여한 여성 200여 명의 인터뷰를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이다. 일명 '목소리-소설 Novels of Voice'이라는 독특한 문학 장르를 창시한 그는 소설가가 아님에도 2015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 대부분은 10대일 때 자발적 혹은 강제적으로 군대에 징집되었으며, '전차병', '보병'. '자동소총병'처럼 가장 남성적인 군대 보직을 포함하여 세탁, 요리, 간호, 정찰 등 전장에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전쟁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다채로운 빛깔의 모자이크처럼 펼쳐진다.
수많은 10대 소녀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어른들, 추위, 굶주림,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전쟁터의 일상들, 그 속에서 그들은 매일같이 죽음을 목도하고 부상을 입고, 성폭력을 당하고,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게 된다. 그럼에도 초경을 하고, 머리를 곱게 땋고, 노래를 부르고, 사랑에 빠지는 소녀 병사들의 모습은 저자의 개입이나 해석 없이 구술 기록으로 생생하게 재현된다. 여성들의 목소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전쟁의 현장으로 인도한다. 구술 기록은 소비에트 연합의 영웅 서사에 가려진 인간의 고뇌와 고통을 집중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목소리는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보다 강력한 힘을 지니며, 소설처럼 강렬한 흡입력을 가진다.
전쟁의 기억은 그들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깊은 상처로 남아있지만, 여자들은 왜 '자신들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전쟁이 끝난 후에 참전 군인은 전쟁영웅이 되지만, 전쟁에 참전한 여성들은 여성성을 상실했거나 훼손된 존재로 여겨졌다. 전쟁의 영광과 피해 모두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기에 여성들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드러날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전쟁이라는 절대적인 남자들의 세계에서 왜 여자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감정들을 지키지 못했을까? 전쟁에 참여한 여자들조차 여성의 이야기를 물어보지 않았다. 여자들이 자신을 믿지 못했기에 하나의 또 다른 세상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여자들의 전쟁을 기록하기로 결심한다.
지금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살다 보니 전쟁 이야기를 읽는 것은 심리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긴 하다. 그래도 이 책은 한번 읽기 시작하면 멈추기 힘들다. 여성 구술 기록의 역사성과 그 생동감을 느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한번 정독하기를 권한다.
"여자가 살짝 몸을 일으키더니 나에게 조개로 된 아름다운 분통을 내밀었어. 모르긴 몰라도 가진 것 중에서 가장 값나가는 물건인 것 같더라고. 분통을 열었지. 그러자 사방에 총탄이 날아다니고 포성이 울리는 그 한 밤에 분 향기가 퍼지는데....아, 그건 정말 특별한 무엇이었어....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려고 해.....그 분 향기, 그 조개 뚜껑.... 그 작은 생명...... 그 여자아기......집에 와 있는 것 같고....... 진짜 여자의 삶인 것 같은 느낌....."
- 안나 니콜라에브나 흐롤로비치, 근위대 중위, 의사보조(인터뷰 중에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 박은정 옮김
펴낸 곳 문학동네 / 559 페이지
* 1985년 벨라루스와 러시아에서 동시에 출간되어 전 세계적으로 200부 이상이 팔렸다. 3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수백 편의 영화와 연극, 방송극을 위한 대본으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