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아빠에게서 그동안 미안했다는 말을 들었다
“진짜 내 얘기를 하려면 살아온 환경, 가족 얘기를 할 수밖에 없잖아? 어떻게 써?”
“그러니까. 나도 그게 아직 어려워. 모르겠어.”
몇 편의 에세이집을 낸 친구에게 물었다. 친구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해답은 없는 듯했다. 상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부모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알맹이가 빠진 것 같았다. 그러나 돌덩이 같은 솔직함은 또 다른 상처가 되겠지. 그렇게 몇 번 부모님과 나의 이야기를 썼다가 읽어보고 지우길 반복했다. 오늘 쓰는 이 글은, 생채기를 덜 내고 싶다는 소망과 그에 따른 생략을 가미했다.
열다섯 살의 내가 밑줄을 친 문장을 똑똑히 기억한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리나>의 첫 구절이다. 그때의 나는 각자의 불행이라는 단어에 위로받았고 불행을 말하는 책들을 찾아 읽었다. 우리 부모님은 많이 싸웠다. 나는 1806호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목격자였다. 싸움이 끝나지 않는 날이면, 내가 자는 동안 둘 중 누군가가 창밖으로 뛰어내릴까 방문에 귀를 갖다 대고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참 지긋지긋했다. 집을 벗어나고 싶었고, 벗어나기에 너무 어린 내가 싫었다. 경제적으로는 아주 풍족하지 않았지만 부족하지도 않았다. 아빠는 짧으면 여섯 달, 길면 일 년 정도 배를 타는 컨테이너선의 선장이었다. 아빠가 배에서 내려 집에 머무는 시간이 한 달을 넘기면 집은 어김없이 냉랭했다.
엄마와 아빠의 불화만큼이나 나와 아빠의 거리도 멀었다. 아빠는 자식이 저절로 바르게 잘 크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일을 나갔다 집에 오면 애들이 하루가 다르게 커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오랜 기간 위계질서가 중요한 배 안에서 폐쇄적으로 생활했기에 아빠는 우두머리 역할에 익숙했다. 집에서도 아빠가 아니라 선장이었다. 아빠가 내게 건네는 말들은 대부분 명령이었고, 아빠가 생각하는 ‘딸’의 모습에서 내가 조금만 벗어나면 버럭버럭 화를 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이면 엄마에게 ‘당신이 어떻게 키웠길래’로 시작되는 말을 했다. 불행의 씨앗이 된 것만 같았다. 그때의 나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다. 밖에서는 누가 건드려도 눈을 부라리는 되바라진 열다섯이었는데, 아빠에게는 대들지 못했다. 아빠와 손잡고 데이트하는 친구들이 신기했다.
스무 살이 되어 대학에 진학하고, 서울에서 혼자 살게 되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생겼지만, 아빠와 나의 거리는 크게 좁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겁을 상실했다고 해야 하나? 눈에서 멀어지니 덜 무서웠다. 아빠가 전화로 명령하듯 이야기하면 조금씩 반발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연락도 받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싸움이 가능해졌고, 나는 너무 열이 받으면 연락을 끊은 채 잠적했다. 아빠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내게 점점 매달렸다. 내가 잡은 아빠의 약점이었다.
그렇게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며 십 년가량 흘렀다. 취직해 더는 집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않고 생활하는 나, 나이가 들며 유약해진 아빠. 무게 추가 맞춰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뜬금없이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술에 취해 울먹이는 중년의 목소리였다.
“아빠가 니 어릴 때 잘못을 많이 한 것 같다. 손찌검한 게 계속 생각나. 지금 생각해보면 학대였던 것 같다. 미안하다 빈아. 정말 미안해…”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나한테 왜 그랬어요?'라는 질문을 공허하게 외쳐왔으면서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전화기를 들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몇 분 동안 숨죽이며 아빠의 울음을 듣다 입술을 뗐다.
“아빠, 술 마셨어? 난 괜찮아.”
나는 진짜 괜찮았나? 뭐가 괜찮았던 거지? 전화를 받기 전에 이미 천천히 아빠를 용서했던 걸까? 아니면, 전화를 받고 바로 용서한 걸까? 용서를 강요받은 걸까? 이상하게 괜찮다는 말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번의 통화로 지난 30년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그때의 상처는 그대로 마음에 남아 있다. 아픈 기억일수록 더욱 선명하게. 그런데 왠지 앞으로는 조금 더 괜찮아야 할 것 같았다. 그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3년이 흘렀다. 아빠와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나는 더욱더 겁을 상실했고, 아빠는 큰딸의 말을 우선으로 듣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상처받은 아이에서 사과받은 아이가 되었다. 아무것도 없던 일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긴 상처는 사과를 받음으로써 이야기를 끝맺었다. 적어도 더는 수렁에 빠질 때마다 열다섯으로 돌아가 홀로 지난한 불행 속을 헤매지 않게 되었다. 마침표를 찍은 완성된 불행이었다.
요즘도 내 성격이 싫어지는 순간에 입버릇처럼 말한다. ‘이게 다 어릴 때 강압적인 가정에서 자라서… 무시 못 한다니까!’ 아빠와 닮은 내 모습이 보일 때에는 아빠를 탓하기도 한다. ‘아빠 닮아서 그렇잖아? 어떡할래?’ 아빠는 그럴 때마다 멋쩍게 웃는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서’라는 말이 있다. 들을 때마다 속으로 생각한다. ‘자식도 자식이 처음인데. 어쩌란 거지?’ 그러다가 가끔은 가족을 보듬을 여유도 없이 살았던 아빠를 이해하는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내 나이가 그때 아빠의 나이로 가까워질수록. 그럼에도 서로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없을 거란 걸 알기에 굳이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지나온 것을 그곳에 둔 채 앞으로 이렇게 함께 해도 괜찮을 것 같다. 현재 나는 사과받은 아이로 살아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