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회사를 관두는 최고의 순간>
나는 대체 왜 이렇게 살아왔을까,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인생의 암흑기를 꼽자면 주저 없이 취준생 시절이라 말할 수 있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이 시시해서 자소서에 쓸 이야기가 없었다. 계속되는 거절에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족도, 친구도, 남자친구도, 모든 관계가 버거워 잠시 놓아 버렸다. 내가 너무 보잘것없어 보여서, 걸을 때도 땅만 보고 걸었다.
여기 나의 그 시절, 아니 우리의 그 시절들을 훔쳐보고 만든 드라마가 있다. 바로 옥수수 오리지널 드라마 <회사를 관두는 최고의 순간>이다. 드라마의 네 주인공 연지(고원희), 남희(김재이), 혜영(정연주), 현(김지은)은 절친한 친구 사이다. 하지만 각자 취업을 준비하거나, 계약직으로 또는 신입 사원으로 일하며 만만치 않은 세상을 만난다. 공감 200%,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연지는 계속된 취업 실패 때문에 점점 소극적으로 변한다. 사람들 앞에서 큰 목소리로 말하지 못하고, 친구들 앞에서 자신을 비하하기 바쁘다. 자기도 모르게 피해의식이 생겨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왜곡해서 받아들인다. 연지는 대기업 신입 사원인 남자친구 민우(고경표)와도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다 결국 이별한다.
“너넨 다 있는데 나만 없는 거, 뭔지 알아? 명함이야. 나 자꾸 거절만 당하니까,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연지는 친구들 앞에서 울먹이며 말한다. 아무리 밝은 사람이라도, 계속 거절당하면 주눅이 든다. 나를 필요로 하는 회사가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화살은 자신을 향한다. ‘내가 부족해서, 내가 남보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도망갈 수 없고, 남을 탓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나를 몰아세우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정말 내 잘못이 아님에도, 우리는 벼랑 끝에 몰리면 연지처럼 자신을 미워하곤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무조건 알게 된다. 내가 못나서가 아니란 걸, 처음부터 세상이 고장 나 있기 때문이란 걸. 나약한 인간이라 잠시 상황에 마음이 세게 흔들린 것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빠져나올 수 있다.
경험상 20대 중후반은 인간관계에 지진이 나기 쉬운 시기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힘든 시기이기 때문이다. 취준생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바쁜 신입 사원, 이러고 사는 게 맞나 싶은 2~3년 차 직원까지 안 힘든 사람이 없다. 이런 사람들끼리 만나면 주제는 힘든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힘들면, 누군가를 배려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기도 한다.
연지와 남희, 혜영, 현은 늘 그랬던 것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모였다. 하지만 서로의 근황이 힘듦뿐이라 자꾸 불행 배틀을 하게 된다. 견디다 못한 현은 ‘힘든 이야기만 꺼내고, 힘든 이야기만 들어야 하는 게 싫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사실 현도 슬픈 일이 있지만, 잊고 싶어 친구들을 만나러 나온 거였다. 나를 둘러싼 불행의 공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공기가 자꾸 맴도는 느낌. 현은 그걸 견디지 못한 거다.
그들처럼 우리도 불행 배틀의 늪을 피하진 못하겠지만, 함께하다 보면 종종 반짝이며 오는 위로의 순간이 있다. 그것들을 더 유심히 캐치해 서로를 지켜 내는 것, 그것이 최선이 아닐까.
극 중 혜영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는 인물이다. 유일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빵집에 정규직으로 취업해, 매일 좋아하는 빵 냄새를 맡으며 일하는 혜영.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걱정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혜영의 사정도 녹록지 않다. 혜영은 빵집 점주에게 과업을 강요당하며 늘 밤늦게 퇴근한다. 매일 서서 일하느라 한쪽 발목이 아프지만, 제대로 치료받을 시간도 부족하다. 힘들 때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니까 견뎌야 한다고 자신을 다그친다.
“나 벌써 일한 지 3년이다? 그렇게 좋아하던 일인데, 밥벌이로 하니 원수가 됐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돈을 번다는 것. 제삼자가 보기에는 축복받은 것 같지만, 오히려 그게 독이 될 때가 많다. 꿈을 업으로 삼게 되면 내가 생각해왔던 것과는 다른 현실에 부딪힌다. 꿈은 말 그대로 꿈이고, 업은 돈을 벌기 위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 큰 욕심과 부담감에 시달린다. 그렇게 자신을 채찍질하며 일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없어지고 ‘한때 꿈이었던 일’만 남는다. 그리고 어쩌면 그때가, 혜영처럼 마음먹고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
고된 취업 준비 끝에 작은 물티슈 공장에서 일하게 된 연지. 매일 야근에 시달리고 상사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만, 석 달 뒤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겠다는 사장의 말을 믿고 참고 견딘다. 그러던 중, 헤어진 전 남자친구 민우가 찾아온다.
“연지야 나 회사 그만뒀어. 나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 가는데, 같이 갈래?” 힘들게 신입 사원 시절을 보내던 민우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하고 싶은 걸 하러 떠나려 한다. 그 말을 들은 연지의 눈빛은 흔들린다. 하지만 연지는 말한다. “나 취업했어.” 환멸 나는 직장 생활이지만, 정규직이 될 때까지 잘 버텨볼 거라고. 쉽게 도망갈 수 있었지만 선택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상황이 연지의 발목을 잡고 있지만, 연지가 쉽게 응하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민우가 찾은 해답이지, 연지가 찾은 해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지는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티고 생각하다가, 드라마가 끝낼 때쯤 본인이 찾은 해답으로 도망간다. 누구보다 행복한 얼굴로.
누구보다 취업이 절실했던 연지. 직장에서 온갖 모진 수모를 겪어내며 버텼지만, 정규직이 되자마자 회사를 관둔다. 연지의 선택이 비현실적이라고? 아니, 온갖 힘듦을 겪어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세상을 상대로 힘들게 버텨냈던 기억은, 오히려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힘이 되기도 하니까. 후에 연지는 다시 취업을 준비한다. 그리고 면접 전형에서 ‘왜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냐’고 묻는 면접관에게 말한다.
“전에는 몰랐습니다. 어디에서 일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중심에 내가 있어야 한다는 걸. 전엔 몰랐어요. 그래서 이전 회사는 그만뒀습니다.” 취업 준비도, 직장 생활도 모두 처음이라 아프고 힘들었던 연지와 친구들.
회사를 관두는 최고의 순간 같은 건 드라마에 나오지 않지만, 대신 더욱 중요한 걸 알려준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삶을 살든 중심엔 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체크리스트는 하나면 충분하다. 나의 삶 중심에, 내가 있는가? 자신이 건재하다면, 우리는 지금 꽤 괜찮게 살고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