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롱씨 Dec 18. 2016

대학, 그리고 취업.

업계종사자로 거듭나다

2005년. 부산에서 갓 상경한 촌티가 풀풀 흐르던 내가 디자인업계에 종사하며 지낸지 어느새 15년 차가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디자인을 하며 산다는 것. 그 어느 나라보다 디자인 인력이 넘쳐나고 신입 디자이너의 월급은 백만 원 남짓일까. 그들의 노동력과 아이디어는 누구라도 대체가 가능한 것이라 여기며 그 귀중한 것을 값싸게 취급하는 곳. 별것 아닌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별것 일 수도 있는 이야기.

뭐 대단한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니다. 그냥 15년을  지내오며 내가 느낀 것. 나의 경험. 

지금의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 싶은 것뿐.



부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연극을 배우며 연극배우의 길을 꿈꿨던 어린시절.

1999년 종말론과 함께 급격히 몰아친 IMF의 영향으로 인해 집안경제가 무너졌고 입시를 위해 다니던 극단도 그만두게 되었다. 학원비같은 사치를 부릴 형편따윈 내겐 없었다.

예체능으로 입시를 준비하다 갑자기 찾아온 진로의 고민에 미술학원을 다닐 형편도 안되었고, 어릴적 상 몇 번 받아봤다는 핑계로 전국의 실기없는 미대 입학과정을 찾고 또 찾았다.

결국 난 아그리파 한번 그려본적 없는 미대생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입학한 과는 이름하여 거창한

'멀티미디어 디자인과'.

업계의 트렌드가 바뀜에 따라 대학의 교과과정도 바뀐다. 그리고 과의 정체성또한 흔들린다. 내가 입학했던 시기의 우리 과는 정체성의 과도기에 편승해, 편집과 캐릭터, 영상과 웹디자인, 3D디자인과 전시디자인. 그야말로 과 이름에 딱맞게 많은 것을 가르치며 많은 부분 경계를 허무러뜨린 학과였다. 멀티로 키워낸 졸업생들을 여기저기 어디에라도 취업이 가능하게 해준 과...라고 말할수 있었다.




부산에서 에이전시를 다니던 한 선배가 말했다.

"디자인을 하려면 무조건 서울로 가. 부산에서는 동네 치과, 동네 회사, 동네 가게 디자인 밖에 못해. 한계가 있어"

그 선배의 말을 들은 후 부터 나는 모로가도 서울로만 가자 라는 생각으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4학년 졸업작품을 마치고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 그야말로 멀티로 많은 것들을 배워내다보니 이것도 조금, 저것도 조금. 조금씩 할 수 있는 인재가 되어버린탓이였을까. 웹을 해야할까, 영상을 해야할까,.

UI디자인을 해볼까. 이런저런 고민끝에 편집 디자인 쪽으로 진로를 결정했다. 고생의 결과물이 내 두 손에 쥐어지는 종이의 매력이 좋았다. 그때부터 편집디자인, 사보디자인 등을 하는 에이전시 위주로 이력서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면접을 수차례 보고다니던 어느 날, 그냥 뭣 모르고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가게 된 패키지 에이전시. 계동이라는 한적한 동네에 자리한 2층짜리 흰 사옥은 부산에서 갓 상경한 꿈 많던 20대의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했고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은 난 월급이 얼마인지도 모른 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냥 회사가 이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심가득한 막내디자이너로써 첫출발을 하게 된 것이였다.

그 15년전의 사심 가득했던 선택이 15년차 패키지디자이너를 만들었고 업계 종사자로 거듭나는 출발점이였던 셈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대한민국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간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