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하지 않습니다
6개월의 인턴생활을 마치고도 계속되었던 야근과 철야. 그 시간동안에도 나는 디자인이란걸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아침은 청소와 설겆이로 업무를 시작했고 저녁엔 다음날 디자인 보고를 위한 보드 칼질을 했다. 갖가지 샘플과 보드작업을 위한 테이블이 있던 구석의 작은 창고방에서 얼마나 서서 칼질을 해댔는지. 나중엔 그 창고방에 들어서면 마음의 안정을 느낄정도였다.
나의 업무 중 가장 중요했던 일은 사장님의 원두가 떨어지지 않도록 사다놓는 것이였고, 간혹 날씨가 좋아 2층 테라스에서 와인파티라도 열리게 되는 날이면 오후부터 정육점, 마트 등을 돌며 장을 보고 재료준비를 하고, 작가들의 비싸고 무거운 그릇들을 조심스레 옮기고 닦았다.
그 당시 회사 내, 단 한명있던 유일한 남자직원은 사장님의 파티 손님들이 도착하면 발렛파킹 기사로 변신했고 파티가 시작되면 올라가 숯불을 피우며 고기를 구웠다. 오죽하면 같이 자취하던 동생들조차 나를보며 이런말을 하곤했다.
"언니는 디자인 회사에 취업한게 아닌것같아. 늘 듣는 얘기가 오늘은 뭘 디자인했다가 아니라 오늘은 무슨파티를 했고 무슨메뉴를 차렸다. 그런 얘기뿐이라 메이드로 취업한것 같아."
그렇게 파티라도 하는 날이면 사장님의 손님들은 밤 10시가 넘어 돌아갔고 같은 건물 바로 아랫층에 살던 사장님까지 귀가하고 나면 한시간 가량 뒷정리와 설겆이를 하고난 뒤, 다시 각자의 자리에 앉아 남은 일을 끝내야했다. 파티는 거래처 임원부터 사장님의 절친들까지 참 다양하게도 열렸다. 그저 회사 사옥이 이뻐서 출근을 결심했던 나였지만 그 예뻤던 사옥은 사장님의 업무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였다.
그 시절 야근은 너무나도 당연한 하루의 일과같은 시간이였고 팀장님은 매주 월요일밤 11시가 되면 "오늘은 우리 일찍 좀 갈까요~?" 라며 이른(?) 퇴근을 선행해주었다. 그당시 우리의 평균 퇴근시간은 새벽 1시~2시, 조금더 일 해야겠다 싶은 날은 새벽 3~4시 퇴근이 당연했었다. 졸업도 전에 취업한 막내 디자이너에겐 과중한 업무가 떨어지지 않았고 단순 잡업무와(주로 설겆이, 청소 등) 다음 날 일찍 출근해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아주는게 더 중요했기에 다른분들보다는 나름 일찍 퇴근할수 있었다. 일찍 새벽1시에...
사장님 테이블 정리, 장 봐오기, 파티준비, 크리스마스트리 만들기, 보드에 시안붙이고 칼질하기, 눈오는 날엔 사장님 출근하기 전 앞 마당에 주차장 눈쓸기 등...눈만오면 출근이 어찌나 하기 싫었던지.. 회사의 잡업무를 담당하는 막내 디자이너가 되어가는 동안 같이 살던 동생1은 그저 다를것 없었던 현실의 막막함에 그래픽디자인 에이전시를 관두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선생님이란 꿈을꾸며 다시 수능공부를 시작했고, 원대한 꿈을 품고 영상디자인 스튜디오에 취업했던 동생2는 골초 선배들이 사무실에서 담배를 펴대는 바람에 폐암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며 회사를 관뒀다.
아마 이때부터였던것 같다. 내 직업관이 생긴게.
'똥은 무조건 출근해서 회사에서 싸자'
물론 집에있는 시간이 몇시간이 채 되질 않았고 잠만자고 나오기 바빴기 때문에 똥은 당연지사 회사에서 싸는게 마땅했지만, 그 어린마음에도 많이도 억울했던건지. 똥이라도 싸고오자 싶었던거지. 물론 이 모든게 2005년. 15년전 이야기라 요즘도 이런 만행을 서슴치 않는 디자인에이전시들이 있을까 싶지만. 있으면 댓글 달아주세요. 제가 노동부에 신고해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