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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린 산천어 Sep 13. 2023

영화「잠」리뷰, "가족, 집, 잠" 스포일러 주의

도망칠 수 없기에 맞서야 한다.

영화 '잠' 신혼부부 중 '수진'(정유미 배우님)


 인간은 도망을 잘 치는 동물입니다. 인간이 생태계 피라미드의 최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사회성과 지구력입니다. 표범이나 호랑이가 인간에게 송곳니를 내보이며 위협하면, 인간은 자신의 속한 무리와 힘을 합쳐 맹수를 몰아내거나 동굴을 향해 쉬지 않고 도망쳐 생존해왔습니다. 그러나 영화 〈잠〉에서 주인공이 맞닥뜨리는 공포의 대상은 ‘가족’이며, 위협이 일어나는 장소 역시 ‘집’입니다. 가족과 함께 집에서 취해야 하는 휴식의 행위인 ‘잠’조차도 주인공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이자 모든 문제의 단초가 됩니다.

 

 작중 등장인물들은 모두 가족 관계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주인공 부부 중 아내인 수진은 어머니 밑에서 자라 가족에 대한 의지가 가장 강한 인물입니다. “부부는 무엇이든 함께 극복해야 한다.”라는 말을 버릇처럼 하는 데에서 그 굳은 생각이 돋보입니다. 남편인 현수 역시 정확한 가족관계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둘이 함께하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라는 명판을 만들어 벽에 걸어놓은 것이 현수입니다. 영화 초반부터 보여주는 둘의 끈끈함의 기저에는 동질감이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아랫집 여자 민정 역시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작중에서는 이혼하고 아들을 홀로 키우고 있습니다. “결혼 별거 있어요? … 관둬버려요”라는 민정과 “나도 너 혼자서 이렇게 잘 키웠잖아.”라는 수진의 어머니의 말, 그 은연중에 방어기제가 엿보입니다.

 

 수진과 현수는 공포로부터 도망칠 수 없습니다. 주인공을 공포로 몰아놓은 가족, 집, 잠은 인간이 떠날려야 떠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수면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가족과 집에 대해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에게 주어진 길은 오로지 배수진입니다. 대상을 마주 보고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과의 연대와 집으로의 도주에 실패한 인간, 이제는 한 마리의 나약한 영장류로 전락한 수진이 선택한 것은 바로 초월적인 힘, 무속을 믿는 것입니다. 마치 선사시대의 인류가 거대한 곰에 맞서기 위해 제사장에게 복종하고 신적인 존재에게 제사를 올리듯이, 수진은 무당의 말을 듣고 부적을 사서 현수의 침대 밑에 붙입니다. 현수가 자는 틈을 타 나체 상태로 만든 뒤 굿을 벌이며 의사의 전문적인 소견과 현수의 말은 듣지 않지요.

 

 영화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열린 결말로 끝이 납니다. 첫 번째는 춘기 할아버지 귀신은 실제로 현수에게 빙의했으며 수진은 민정의 목숨을 건 인질극으로 그를 쫓아냈다는 것, 두 번째는 배우인 현수가 마치 춘기 할아버지 귀신에게 빙의된 척 연기를 해서 배우자 수진을 안심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되었건 간에 두 사람의 가족, 집, 잠은 앞으로도 평온하지 못할 것 같은 찝찝함을 남깁니다. 현수는 포기하려는 모습을 보이며 수진에게 실망감을 남겨주었고, 수진은 범죄를 저지르고 미신에 손을 대면서 사회와 가정에서 정상적인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재개할 수 있을지 막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수진이라는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면서 영화를 봤습니다. 작중에서 완전히 미쳐버리는 인물이지만 저도 만약 같은 입장이었다면 미치지 않을 자신이 없다고도 생각했습니다. 나아가 가족에 대한 상처가 오히려 가족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도 저와 어느 정도 공통점을 가졌기에 저를 투영시키기 쉬웠습니다. 제가 유교에 빠져든 이유, 공자께서 효의 가치에 대해 역설하고 붕괴된 공동체를 수복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유년기, 청소년기에 겪었던 가족 결손에 의한 콤플렉스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수진처럼 가족, 집, 잠에 생긴 모든 문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깊게 하게 되었습니다. 유교는 무속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럼에도 어떠한 믿음이라는 점에서 같지요. 유교는 종교가 아니에요 라면서 쉬운 소리를 해대는 사람들의 말과 달리 위기의 상황에서 도를 따르는 선비들의 믿음은 마치 성직자의 그것과 닮아있으니까요.

 

 올해에 제가 본 영화인 오펜하이머, 존 윅 4, 범죄도시3, 엘리멘탈 가운데 가장 깊은 인상을 심어준 작품은 단연 이 영화입니다. 이웃분들께 꼭 보시라고 추천드리고 싶네요. 배우가 7명 정도(개 포함 8?)밖에 나오지 않는 초저예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연기를 너무 잘 하셔서 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신선한 공포영화입니다. 현실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요소가 등골을 서늘하게 해줍니다.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는 말이 무엇인지 톡톡히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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