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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Jun 20. 2023

이런 회사에서도 살아남아야 하니까

 나는 거짓말을 잘 못한다. 거짓말할 때 눈동자가 흔들리고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몸을 긁다 보니 상대방이 쉽게 알아차린다. 그럴 바에 솔직하게 말하는 게 편하다. 티 나는 거짓말을 해봤자 서로에게 좋을 게 없다. 그래서일까? 묻는 말에도 꾸밈없이 말하는 편이다. 이건 내 성향도 한 몫하겠지? 상대가 누구인지에 따라 자신을 감출 줄도 알아야 한다는데, 나는 그런 게 없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대하다가 나와 잘 맞으면 친해지는 거고 잘 맞지 않으면 경계를 둔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자리에 없는 사람을 욕하며 상대와 친해지는 사람, 앞에선 친함을 내보이고 뒤에선 그렇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직접 경험한 게 아니면 상대가 어떤 말을 하든 영향받지 않는 사람이나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20대 때는 나와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을 보며 상처받았다. 사람 자체에 의심이 생겼고 어떤 사람을 만나든 불편했다. 웃고 있는 얼굴 뒤로 어떤 욕을 하고 있을지 상상하며 스스로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반면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도 그런 사람을 욕하면 되니까. 즉 우리는 들키지 않게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을 욕하고 불만을 내뱉으며 산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 또 상처받겠지만.


 이제야 본론이다. 요즘 회사에서 표정 관리가 어려운 상황을 많이 겪고 있다. 직급 상관없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탓하기 바쁜 상황. 뒤에서는 서로를 불신하는데, 앞에서는 없어서는 안 된다며 칭찬하기 바쁜 모습. 이럴 때마다 어떤 얼굴로 있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물론 일하다 보면 본인과 달라 답답한 경우를 많이 만난다. 그렇다고 티 낼 수 없으니 적당히 웃는 게 편하다는 것도 안다. 아무리 상대가 싫어도 함께해야 하고, 답답해도 같이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다. 명확한 얘기만 하면 될 거 같은데, 꼭 뒷담을 나눠야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들 같았다. 본인이 우월하다는 걸 다른 사람을 깎으면서 지키는 듯 말이다.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는데 어느새 따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상황을 말하자면 이렇다. 곧 나와 함께 일할 사람이 입사한다고 해서 신났다. 혼자 아이디어 싸움 하고 실행하는 게 버거울 때쯤이었다. 그동안 상사가 없던 터라 나를 끌어줄 사람이 오는 것만으로도 설레었다. 그 설렘은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출근하자마자 잘 챙겨주기 위해 내민 손이 무안함으로 돌아올 때가 몇 번 있었다. 가령 '여기에 간식이 있어요.'라는 말에 나를 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인다거나. '이 회사에서 어떤 업무를 주로 하고 싶어요?'라고 묻는 질문에 '지금 업체랑 콘텐츠 기획하고 제작하는데 재미있어서 집중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더니 '지금 하고 있는 콘텐츠 업체, 계약 해지하면 비용이 드나요?'라는 답을 들었을 때이다.


 조용했던 그 사람은 특유의 미소와 상대방을 무시하는 듯한 느낌이 보였다. 기대와 벗어나자마자 묘한 불안감과 무서움이 밀려왔다. 편견을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편견이 생기려 했다. 나의 앞날을 상상하니 막막했고 답답했다. 시나리오는 끝없이 써 내려갔고 결국 퇴사까지 생각이 이어졌다. 팀원에게 불안하다고 말하며 그 사람이 내게 한 말을 꺼냈다. 말을 할수록 퇴사가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은 좋지 않았다. 상처받고 싶지 않고 불편한 상황이 싫어서 일어나지도 않는 일을 또 피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본 상황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 얼마나 잘하나 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 한번 보여줘! 라며 옆에서 배우는 사람도 있을 테다. 상대의 생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당사자의 성향도 있겠지만 나는 기다린 끝에 겨우 얻은 기획마저 잃을까 봐 억울하고 화가 났었다. 아마 일 욕심이 있어서겠지.


 그맘때쯤 친구를 만났다. 남편과 창업한 친구는 남편이 본인을 무시한다고 털어놨다. 일의 힘듦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고 상처되는 말을 한다고. 또 다른 친구는 같이 일하는 사람이 일을 대충 해서 자기만 혼난다고 했다. 다들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끓어도 100도를 넘기진 않았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도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며 일상을 이어간다. 이렇게 답답함을 나누고 서로의 위로에 온도를 식히면서.


 친구를 만나니 생각이 더 많아졌다. '일어나지도 않는 일에 지레 겁먹고 그만두는 게 맞을까. 어디를 가나 이상한 사람은 있기 마련인데.' 이렇게 머뭇거리는 사이에 그 사람과의 오해가 풀렸다. 이유를 말하지 않고 결론부터 말한 그의 행동에 무시받는 기분이었다. 만나자마자 ‘너 그거 하지 마!’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시간이 지나 대화를 나누다 장난이었다는 말을 듣고 아차 싶었다. 물론 당황스러웠던 대화는 많았지만 상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써 내려간 시나리오가 섣부르다고 생각했다.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 건데, 그러다 보면 때가 올 텐데. 성격이 급한 탓일까 무서워서일까 자꾸만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나를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가장 쉬운 방법을 찾아 잠시 대피하는 것 같기도 하다. 피하는 게 나쁘다곤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이렇게 피하기만 하면 나는 또 의미 없이 던진 상대의 말에 상처받고 도망가려 할 거다. 당황스러웠다면 그 자리에서 이유를 물어보고 해결하는 게 필요하지 않나 싶다. 물론 해결의 과정은 번거롭고 어렵다. 하지만 늘 부딪히는 부분이고 언젠간 경험해야 한다.


 오해가 풀리면서 괜히 미안하기도 했고, 무언가 억울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당황스러움을 털어놓은 탓에 가벼운 사람으로 보일까 봐 부끄러웠다. 싫다며 혀를 찼던 사람들의 행동을 내가 하고 있는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결국 나도 이렇게 되는 건가.' 말에 무게를 둘 필요가 있다. 다시 열심히 해보기로 했다. 처음부터 삐거덕거렸던 탓에 일하면서 많은 역경이 생길 거라 예상된다. 하지만 일단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일단 나보다 능력이 뛰어다니는 걸 받아들이고 감정적이기보다 이성적으로 다가가기로.


 일하다 보면 적당한 고집도 있어야 한다. 상대의 말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의 확신도 있어야 하고. 결과물이 좋지 않으면 실무자 탓이다. 아무리 '이 사람이 시켰어요.' 해도 소용없다. 설득하지 못한 내 잘못이 되어버리니까. 만약 그런 고집이 있었다면 '지금 하고 있는 콘텐츠 업체, 계약 해지하면 비용이 드나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당황은 접어두고 왜 이 일이 중요한지 설명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왕 열심히 하기로 한 거 나도 디테일하게 업무를 체크하는 습관을 들이고 내 의견을 설득하기 위한 과정에 노력을 쏟아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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