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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실 Dec 04. 2023

여행하는 방법을 까먹은 채 무작정 걸었다

홍콩 여행에세이(일기)

#1

 아무래도 여행하는 방법을 까먹은 것 같다. 여행 준비물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도 뭔가 빠뜨린 기분이었다. 분명 빠진 게 있는데 그게 뭔지 몰라서 시간만 확인하며 마음 졸였다. 여행 준비가 덜 된 걸까? 그렇게 불안한 채로 홍콩으로 떠났다. 오랜만에 혼자 가는 여행이라 설레기도 했고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홍콩에 도착했다. 낯선 냄새, 낯선 간판, 낯선 사람. 밤에 도착했던 터라 도시는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했다. 건물은 높았고 사람들은 신호등을 무시한 채로 바쁘게 길을 건넜다. 홍콩 사람들과 달리 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떤 나를 만나게 될지 기대됐고 홍콩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지도 궁금했다.


 호텔에 짐을 내려놓고 카메라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짐이 없어 가볍고 정해진 목적지가 없어 발길 닿는 대로 걷기만 하면 되니 부담도 없다. 지도를 보지 않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길을 조금씩 익혔다. 소개받은 곳이 아닌 내 힘으로 맛집을 찾고 꼭 가야 할 곳이 아닌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찾으면서. 우연으로 만들어진 일상 덕분에 내 여행이 조금씩 채워졌다. 내가 낯섦을 즐기는 방법!


#2

 우연, 나는 우연을 좋아한다. 아마 <지구별 여행자> 책이 한몫한 것 같다. '삶에서 만나는 중요한 사람들은 모두 영혼끼리 약속을 한 상태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야. 서로에게 어떤 역할을 하기로 약속을 하고 태어나는 것이지. 모든 사람은 잠시 또는 오래 그대의 삶에 나타나 그대에게 배움을 주고, 그대를 목적지로 안내하는 안내자들이지.' 나는 오늘도 약속한 인연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왔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 오면 자유로워질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소심해졌다. 내 영어 발음이 이상할까, 잘 못 알아들을까, 말을 걸까 봐 눈을 피했다. 알아듣지 못해도 다 통하는 방법이 있을 텐데. 학창 시절에도 그랬다.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며 발표시킬까 봐 속으로 제발 시키지 말라고 주문을 걸며 눈을 피했다. 그렇게 피하고 외면하다 보니 나는 내 의견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고. 다 좋다 보니 괜찮은지 괜찮지 않은지도 확신 없었다. 그렇게 나는 소심한 아이가 됐고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며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어떤 일을 하든 나라서 못할 거라며 뒤로 물러났고 나니까 할 수 없다며 손사래 쳤다. 속마음과 다르게. 마음과 다른 길을 걷다 보니 마음의 병이 생겼다.


 이럴 때 내가 사는 곳에서 벗어나는 게 필요하다. 그럼 내 일상에 작은 틈이 생기니까. 나조차도 알아주지 못한 마음이 미안해서 이제라도 내가 원하는 걸 알아보려 애쓰는 과정에 놓인달까. 형체 없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며 말이다. 아마 내 일상이 마음이 들지 않아 여행이 필요했던 것 같다. 이곳에 오는 순간 ‘왜 나라서 안 되는 거야? 나라서 할 수 있을 수도 있잖아.’라며 나를 응원했다.


 갑자기 내가 어학연수를 가고 싶어하는 것도 이 이유인 것 같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나를 나로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진짜 내가 나를 꺼내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형체 없는 것에 겁내지 않을 힘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어학연수가 답이 아닐 수 있지만, 나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고 싶은 것 같다.


#3

 거리에 들리는 라이브 공연에 발길이 멈췄다. 자연스럽게 바에 들어가 맥주 마시며 오늘의 하루를 남겼다. 공연이 끝나자 매장에서 fight song(rachel platten) 음악이 나왔다. 힘에 겨울 때마다 들었던 곡이었다. 내가 다시 기운 차릴 수 있게 해 준 곡이었는데 첫 번째 곡으로 들리니까 기분이 묘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바보 같고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는데 여기서도 잘 지내보자는 메시지를 건네받은 기분이랄까. 그나저나 맥주 너무 맛있다.


#4

 뭔가 봐야 할 것 같고 뭔가 먹어야 할 것 같고 뭔가 해야 할 것들에게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무계획으로 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날씨는 좋고 시간은 많고 돈도 충분하다. 어딜 가지 않고 이렇게 하루하루 여유롭게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지도 모르겠다. 퇴근하고 글 쓰고 퇴근하고 다른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가 조금 어색하지만 그래도 이 어색함 덕분에 놓친 생각들을 하나씩 하나씩 모으고 있다.


#5

 다리가 너무 아팠다. 무계획도 여행이 될 수 있다며 하염없이 걸은 탓이었다. 카페를 찾으니 카페가 없었고 밥집을 찾으니 딱히 끌리는 밥집이 없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걷고 흘깃 보며 지나쳤다. 만나는 가게마다 내가 원했던 기준이 높아지면서 '다른 곳, 더 괜찮은 곳'을 찾다 보니 다리만 점점 더 부었다. 아마 이렇게 힘들게 걸어왔으니 더 맛있는 곳, 더 괜찮은 곳을 찾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그 괜찮은 곳도 결국은 내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건데.


 실패 없는 여행을 하고 싶으니 완벽한 계획, 누구나 맛있다고 하는 맛집 등을 가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그게 나와 딱히 맞는 것 같진 않다. 물론 나도 어렵게 시간내고 돈 내서 왔는데 제대로 즐기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싫다. 다만 어렵게 온 이 여행이 스트레스가 되고 싶지 않으니 오늘 하루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살아보려 한다.


#6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나 스트레칭하며 일어났다. 여행이 익숙해진 걸까. 아니면 이제 여행의 설렘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이상하게 홍콩 여행이 재미있지도 재미없지도 않았다. 다들 홍콩 갈 때 마카오도 다녀오는 게 어떻냐, 시간을 알차게 쓰는 게 어떻냐 등의 이야기를 해줬다. 알찬 게 무엇인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몇 분 뒤 어떤 생각을 했는지 까먹은 채 또다시 걸었다. 내가 가야 할 곳, 가고 싶은 곳을 찾아 나섰다.


 낯선 곳을 처음 마주할 땐 설렌다.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들뜬달까. 그 낯섦이 점차 익숙해질 때쯤 집으로 돌아갈 때가 온다. 조금은 아쉬움이 남기 마련인데 홍콩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홍콩 여행을 잘 즐긴 덕분인지 아니면 여행 자체가 무뎌진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에서의 일상 일부분을 홍콩으로 가져왔다. 카페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거나 스트레칭을 하는 등. 그래서 여행하면서 내 일상을 지키는 기분이었다. 이것도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바로 다음 날 출근하는 게 힘들지 않았다.


홍콩여행 1일차

홍콩여행 2일차

홍콩여행 3일차

홍콩여행 4일차

홍콩여행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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