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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백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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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 Jul 12. 2018

백수일기 #001

백수가 되다


지난 3년간 다녔던 출판사는 내가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이었다.
업계에서 알아주는 브랜드 출판사는 아니었지만 꾸준한 매출로 동화 사업을 시작하려는 곳이었고 면접에서 대표의 “한국의 디즈니를 만드는 게 목표다.”라는 말에 포부가 느껴져 입사를 결정했다. (그땐 몰랐다. 그의 포부는 늘 망상일 뿐이라는 걸) 하지만 한국의 디즈니는 축대도 세우기 전에 무너졌다. 


‘작가, 기획자’로 입사했던 나는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마케팅 담당자가 되었고 곧이어 출고 담당자가 되었다가 영업자가 되기도 했다. 디자인 업무 빼고는 모든 일을 한 것 같다.


 하지만 초년생이었고 작은 회사였기에 ‘어쩔 수 없지. 배운다는 마음으로 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실제로 출판업의 생리를 알 수 있어 좋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회사가 파주로 이전하며 대표의 목표가 터무니없이 높아졌다. 이름 난 작가를 섭외하기 위해 거짓으로 가득한 제안서를 만들어야 했고 스스로가 마케팅 전문가라 믿는 대표의 말마따나 빈손으로 ‘서점에 읍소’하러 다녀야 했다. 좋은 책으로 승부하고 싶다는 바람은 이미 까마득해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무식과 무례가 습관이 된 상사의 괴롭힘까지 더해지자 퇴사를 떠올리는 것이 습관이 됐다. 어제 한 말을 까먹는 건 사탕을 까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요, 점심시간에 여자 사원들 사이에 앉지 않으면 며칠간 삐쳐 업무에 괜한 트집을 잡기도 했으며 회의를 하자고 불러선 직원들의 연애 생활을 묻던 그. (남자친구가 없다고 하면 본인 친구와의 소개팅을 주선했다. 그의 나이 쉰, 사내 평균연령 28.5세)

결정적으로 ‘돈 내는 사람이 갑’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몸소 그 이론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협력 업체를 하청업자라 부르며 반말은 기본, 축하 화환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래를 끊기도.)


 그가 사방팔방으로 쏘아대는 화살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 모두가 그의 눈치를 보며 그가 웃는 날을 골라 결재를 받았고 인사조차 받지 않는 날엔 쥐 죽은 듯 악다구니에 대비했다.



누가 그랬던가? 직원들의 단합력은 상사의 꼰대력에 비례한다고. 



덕분에 직원들은 가족만큼 끈끈한 유대를 갖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일같이 채팅방에 키보드를 두드리며 갖은 비유로 그를 조롱하는 것뿐이었다.


출처: <셜록>의 대사



납득되지 않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고 그때마다 원인을 찾아 이해하려 노력하다보니 감정소모가 심했다. 그의 기분에 이리저리 휘둘리다보니 업무 집중도도 떨어졌고. 이대론 안 될 것 같아 방법을 찾았다. 그를 바꿀 수 없다면 내 쪽에서 관심을 끊자. 그가 ‘왜 저럴까’ 고민하지 말고.



생각보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마음속으로 ‘그래, 짖어라’를 되뇌니 예민하게 받아들이던 무례한 말들이 체에 걸러진 듯 점차 들리지 않게 되었고 표정과 말투에서 무관심이 드러나니 그도 조금이지만 조심하는 듯했다. 드디어 그와 나의 밸런스를 찾은 것인가. 우리의 스텝이 이제야 박자를 맞추기 시작한 것인가. 



결과적으론 착각이었다. 그는 박자를 지배하고 싶어 했다. 그동안 본인의 기분을 잘만 맞춰주던 녀석이 갑자기 돌아선 게 괘씸했던(?) 그는 나의 무관심을 마음 한켠에 쌓아뒀다가 두고두고 갚아줬다.


출처:심슨 가족




기껏 찾아 낸 방법도 수포로 돌아가고 오로지 버틴다는 일념으로 삼 년차까지 버텼지만 끝없이 떠밀리는 업무와 무례함을 견디는 데에 한계가 왔다. 방법을 찾는 게 무의미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지만 천 배는 큰 인간이 밟는데 그게 어디 이겨보겠다는 ‘꿈틀’이겠는가. 고통의 몸부림이지. 



이런 무기력한 생각이 반복되자 간신히 버티고 있던 자존감이 급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매일 술을 마시지 않고는 잠이 오지 않았다.  벗어나야 했다. 겨우 스물일곱인데. 새로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늘 바탕화면 구석에 있던 사직서에 날짜를 적어 프린트했다. 상사는 사직서를 보고 당황스럽다는 듯 순진한 얼굴로 “왜?”를 반복했다. 혹시나 싶어 그의 만행 중 하나를 읊어줬으나 역시나 “기억 안 나”라는 답변이 돌아와 마음이 더 굳건해졌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나는 퇴사했고 백수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출처: 해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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