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_지금은 기후열파시대
08_지금은 기후열파시대
기후의 시대, 국경의 질문
기후 변화는 더 이상 환경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거주와 이동, 생존과 국가, 시민권과 경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새로운 정치의 조건이 되었다. 자일스 슬레이드(Giles Slade)가 펼쳐 보이는 기후열파의 서사는, 단순한 이상기후가 아니라 ‘살 수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를 묻는다. 기온의 상승은 곧 거주의 붕괴이며, 이는 이동을 강제한다. ‘살기 위해 이동할 수밖에 없는 시대’는 이미 도래했으며, 이제는 누구도 그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저자와 문제의식
자일스 슬레이드는 북미의 소비 문명, 사회적 단절, 기술 종속 등을 통찰력 있게 비판해온 문화 비평가이자 수사학자이다. ≪깨기 위해 만들어 지다(Made to Break)≫와 ≪커다란 단절(The Big Disconnect)≫를 통해 현대 문명이 지닌 자기파괴적 구조를 성찰한 바 있다. ≪미국 탈출(American Exodus)≫는 2009년 집필 당시 기후 위기 담론의 변방에 머물렀으나, 2012년 연이은 기후 재난과 사회적 공감대의 변화 속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기후 문제를 단지 자연과학의 영역이 아닌, 문명사적·윤리적 전환의 중심 주제로 끌어올린다.
기후열파와 생존 조건의 재구성
기후열파는 더위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조건의 붕괴이며, 삶의 기반이 되는 물, 식량, 주거, 전기 등의 접근 가능성이 급격히 저하되는 상황을 말한다. 캘리포니아, 텍사스, 대평원 지대는 이미 ‘수용능력(carrying capacity)’을 초과하고 있으며, 도시 인프라는 자원 부족 속에서 무너지고 있다.
“캘리포니아, 남서부, 대평원, 북동부, 중서부의 수용 능력(carrying capacities)은 급격히 감소할 것이다. 이건 허튼소리가 아니다” (p. xiii)
여기서 “carrying capacity”는 지역이 인구나 생태계가 지속 가능하게 유지될 수 있는 한계치를 의미하며, 기후 변화로 인해 이들 지역이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다.
중산층이 거주하던 지역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며, 거주는 생존을 보장하지 않는다. 열파는 모든 도시와 인간 시스템을 재조정하는 ‘서서히 다가오는 비가시적 재난’으로, 삶의 자리를 옮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미국에서 캐나다로: 북상하는 생존의 흐름
기후열파가 불러오는 가장 강력한 변화는 국경을 가로지르는 대규모의 인구 이동이다. 멕시코인의 이주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이제는 미국 중산층이 남부와 해안 도시에서 밀려나 북쪽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본격화되고 있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물줄기처럼 시작되겠지만, 곧 거센 홍수가 될 것이다” (p. xiv)
이 표현은 기후 변화로 인한 인구 이동이 처음에는 소규모로 시작되지만, 빠르게 대규모 이주로 확대될 것임을 비유적으로 강조한 문장이다.
이 흐름은 단순한 이민이 아니다. 삶을 유지할 최소 조건을 찾아 떠나는 생존의 이동이며, 북위 49도선 너머의 캐나다는 그 최종적 피난처로 부상하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 사이의 5,525마일 국경은 세계에서 가장 긴 비감시 경계선이며, 물리적으로 이를 막을 수단도, 제도적으로 수용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국경의 의미는 점차 무력화되고 있으며, 이는 국가라는 체계 자체의 기능과 윤리를 묻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기후열파와 이주 조건 비교>
구분 / 사례 / 특징 / 정치적 함의
과거 / 1930년대 더스트볼 / 대평원 황폐화 → 국내 이주 / 미국 내부 최초의 기후 난민 발생
현재 / 텍사스, 캘리포니아, 해안 도시 / 수자원 고갈, 열섬 현상 / 중산층의 서서히 진행되는 탈출
미래 / 미국 → 캐나다 / 국경을 넘는 대규모 환경 난민 이동 / 북미 사회 전체의 구조 재편 가능성
제도적 무능과 생존권의 윤리
슬레이드는 기존의 재난 대응 체계가 완전히 무력화되었음을 지적한다. 미국의 법적·행정 시스템은 ‘원래 살던 지역으로의 복구’를 전제로 설계되어 있으며, 이주 자체를 정책적 옵션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법적 체계는 마치 석탄을 태우는 골동품과 같아서, 공동체가 원래 있던 장소에서 손상된 인프라를 수리하고 교체하는 데만 설계되어 있다” (p. xiv)
이 문장은 기존의 재난 대응 법률이 시대착오적이고 비효율적이며, 이주나 지역 이전과 같은 현실적인 대응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표현이다.
알래스카 원주민 마을인 뉴톡, 키발리나, 시슈마레프는 해수면 상승으로 더 이상 재건이 불가능하다. 이들은 단지 이전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과 공동체 전체를 이동시켜야 하는 문화적·사회적 이주자들이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기후정의’와 ‘경계의 윤리’라는 새로운 정치철학이 요청된다. 단지 어느 나라의 시민인가가 아니라, 살 수 있는가, 아닌가의 질문이 국경 위에서 결정된다.
생존을 위한 이동, 국가 이후의 정치
거주 가능 지역이 축소되고, 국경의 의미가 무력해질 때, 국가의 정당성은 생존을 보장하는가의 기준으로 다시 평가된다. 더 이상 시민권은 도덕적 방패가 되지 못하며, 지역성과 공동체성은 이동성의 역학 안에서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영역 / 분석 내용 / 정치적 함의
환경정책 / 기후열파는 인프라·자원 기반의 총체적 붕괴 / 도시계획, 자원 분배 구조 재설계 필요
이주 윤리 / 이주는 이제 저소득층만의 문제가 아님 / 시민권 중심에서 생존권 중심의 전환
정치철학 / 경계는 누가 통과하고, 누가 막히는가 / 국가, 경계, 공동체의 재정의 요구
기후열파의 시대, 누구와 함께 어디로 갈 것인가
기후열파는 단지 더위의 문제가 아니다. 거주지를 잃은 사람들, 국경을 넘는 생존자들, 자원을 따라 이동하는 공동체들, 그리고 이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은 체제들. 슬레이드는 그 모든 과정을 조망하며 묻는다.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살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시대. 생존은 더 이상 국가가 보장하지 않으며, 거주와 이주의 권리는 윤리와 제도 사이의 틈으로 떨어지고 있다. 국경은 더 이상 물리적 경계가 아니라, 생존의 문턱이다.
기후열파의 시대, 그 문턱을 누구와 함께 넘을 것인가.
<참고문헌>
Giles Slade(2013). ≪American Exodus: Climate Change and the Coming Flight for Survival≫. New Society Publish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