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잉투기](Battle of Surpluses, 2011)
잉여를 말하기
칡콩팥 태식이. 그 곁을 지키는 아는 형 희준. 별을 따는 소녀 영자. [잉투기]는 세 잉여의 모습을 그린다. 이들은 현실에 뿌리를 두고 만들어진 인물들이다.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했던 현피 사건의 주인공. 스마트폰이 생겨서 더욱 만나기 쉬워진 아프리카 소녀. 그들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곁을 지키며 조금의 우월의식에 자위하며 살아가는 중산층 자녀. 잉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궁상들이다.
잉여를 다룬다는 것은 새로움과 거리가 먼 선택이다.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는 이야기는 대부분 그들의 것이다. 잉여들의 이야기 바탕에는 허무와 자조가 있다. 쉽게 질리고 지친다. 즉흥적이다. 어디로 튀어나갈지 예측이 안된다. 애정을 쏟다가 돌변해서 저주를 쏟아붓는다. 눈에 띄고 매력이 있어도 완성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그러니 드라마는 잉여에게 운동복을 입히고 구박을 한다. 만화방으로 보내 라면을 먹인다. 현실은 비루하지만 꿈을 꾸며 발랄함을 잃지 않는, 불쌍한 인간으로 그릴뿐이다.
일베와 DC도, 아프리카도, 청년실업도 뉴스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현상을 강조하고 그들을 집단으로 묶는 순간 잉여 개개인의 목소리는 무시된다. 잉여를 '잘'다루는 텍스트라면 사회적 층위로 구분되어 박제된 잉여들에게 제각기 다른 목소리를 선물해야 한다. 잉여 한 명 한 명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일. 여기에 영화의 성패가 달려 있다.
잉투기는 그들을 성장시키는가?
인터넷에서 빌빌대며 잉여로 지칭되던 젊은이들이 링 위에서 정해진 룰을 지키며 싸운다. 잉투기는 그들도 가능성이 있음을 선언하는 자리이다. 잉여들은 격투기를 계기로 나아진다.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땀을 흘린다. 숭고하고 아름답다. 태식을 망가뜨린 젖존슨도 격투기를 통해 잉여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고 싶은 게 뭔지 몰라 괴로웠다는 희준도 샌드백을 치며 희망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태식은 당장 젖존슨에게 복수할 만큼의 힘도 없지만, 마냥 젖존슨 찾기에만 몰두한다. 관장님의 말처럼 격투기는 그를 잉여의 세계에서 탈출시킬 수 있다. 적어도 조금 다른 잉여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태식은 잉투기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를 주저한다.
태식은 영자의 도움을 받아서, 끝끝내 잉투기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다. 젖존슨도 변했었다고 했다. 함께 잉여 짓을 했던 희준이 형도 달라졌다. 이제는 태식의 차례다. 고된 훈련을 견딘다. 시키는 영자도, 태식도 행복하다. 이전보다 나아지는 느낌이 든다. 코스타리카로 이민을 계획하는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나 격투기 대회 나가.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대회 끝나면 뭐라도 해볼게”
잉투기는 잉여들을 나아지게 만드는 개선의 장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태식과 젖존슨의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다. 누가 이기든지 감동적인 결말이 예상된다. 싸움이 끝나면 지금의 삶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잉여들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뒤집어라
세 잉여는 세상의 시각에서 나아졌다고 판단할만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잉투기 앞에 선 그들은 의욕을 갖겠다고, 한번 해보겠다고 다짐하고 나아간다. 격투기를 통해 나아지는 모습에 사뭇 가슴이 짠하다. 하지만 이러한 전개는 [잉투기]가 좋은 영화와 점점 멀어지는 길이다. 의욕을 품고 밝은 내일을 향해 달려가는 '건강한 청년'. 그들을 잉여로 만든 세상은 변함이 없건만 잉여들은 스스로 안정적인 지점으로 수렴된다. 각자의 잉여로서의 목소리를 잃는다. 잉투기가 잉여들에게 치료제라면, 약에 대한 잉여 제각각의 예후도 달라야 할 것이다. 하지만 차이가 없다. 잉여들은 불만을 거두고 모두가 세상을 긍정한다.
아무리 잉여들이 건강해졌다 해도, 세상은 여전히 비정하다. 젖존슨이 대회장에 오지 않는다. 가장 열심히 격투기를 연마했던 희준이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젖존슨의 소식을 듣고 충격을 빠진 태식은 길거리에서 시민들을 공격한다. 영자는 교실을 테러한 후 태식을 자신의 방송에 출연시키기 위해 그를 찾아 나선다. 영화는 러닝타임의 2/3를 잉여들의 개선 과정에 할애했다. 하지만 나머지 1/3은 이를 배반한다. 건강한 청년들은 다시 즉흥적이고 단발적인 잉여의 모습으로 뒤집히고 각자의 목소리를 되찾는다.
무차별 폭행을 저지르는 태식. 밀가루 테러를 자행하는 영숙. 다시 그들 곁에서 함께 하기를 선택하는 희준. 제각기 살아 움직인다. 격투기를 통해 세계의 정교한 룰을 배워왔던 주인공들이, 룰을 공격한다. 영화는 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매끄럽던 서사가 갑자기 뚝뚝 끊어진다. 누군가는 서사의 실패로 판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찜찜함이 설득력을 갖는다. 매끄러움, 보편적 전개와 같은 말은 ‘있음직한 일이니까 설득력을 갖는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잉투기에서 보여주는 균열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세 잉여의 탈주는 서사 논리를 뛰어넘어 충분히 있음직한 일로 여겨진다. 우리를 수긍시킨다. 급진적이고 불순한 설득력. 영화가 한 사회의 징후가 되는 순간이다.
[잉투기]는 누군가에는 통쾌하고, 어떤 누군가에게는 무서운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