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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t to Frame Mar 18. 2016

[Cine] 최후의 말을 하는 자

영화 [혜화,동](Re-encounter, 2010)

 

 혜화(유다인)는 착하다. 집에 개똥이 굴러다닌다.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유기견을 구조하는 일에 열심히다. 자신이 일하는 동물병원 원장(싱글대디)의 아들에게 엄마의 역할까지 대신하는 그녀는 천사다.


     혜화는 아프다.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버림받았다. 같은 날 아이마저 잃었다. 그 기억은 그녀의 삶을 장악한다. 하루하루가 손해 보는 일로 가득하지만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그녀. 이는 지난 시간에 대한 '속죄'로도 보인다.  




   한수(유연석)도 착하다. 죽은 줄 알았던 자신의 아이가 살아있고, 다른 집안에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이후부터 그는 변했다. 아이를 잃고, 부모의 강요에 여자친구를 떠났던 과거에 스스로를 옭아맨다. 아픔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집을 나와 패인이 되었다. 아이가 입양된 곳을 찾아 배회하다 이상한 사람으로 찍혀 봉변을 당하기도 하지만, 딸을 찾고자 하는 열망을 멈추지 않는다. 



     혜화는 아이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한수는 아이가 살아있다고 알고 있다. 두 사람은 기억이 다르지만 모두 그 앞에 선다. 그 방식은 다르다. 

 

    혜화는 담담하다. 유기견을 구한다. 병원 원장의 아이에게 살갑게 대한다. 우리는 이 행동들을 하늘나라에 간 아이의 대신을 찾거나, 혹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행동으로 유추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다. 유추로만 가능한 애도를 반복한다. 그녀는 아프다고 밖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보다는 아픔을 가슴속에 품는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그녀의 얼굴을 따라간다. 우리는 무표정에서 그녀의 아픔을 조금씩 발견할 뿐이다. 

 



     한수는 아픔은 앓는 소리가 크다. 그는 딸을 보기 위해, 무작정 딸이 사는 집을 찾는다. 혜화를 먼저 찾은 것도 한수다. 혜화의 아픔은 그녀의 표정의 작은 변화를 통해 겨우 읽어낼 수 있었다. 반면 한수의 아픔은 그의 행동과 말을 통해 쉽게 읽힌다. 눈물을 쏟는다. 혜화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다. 한수는 아픔 앞에서 큰 몸짓을 취하며, 잘못된 과거를 되돌리고자 발버둥 친다. 영화 초반 연주되었던 '앵콜요청금지'라는 노래가 무색하게 그는 거침없이 앵콜을 시도한다. 이상하다. 적극적인 한수의 행동이 거추장스럽고 불편하다.




  유치원에서 아이를 되찾으려 할 때(납치하려 할 때) 혜화는 주저한다. 그녀는 불법 주차한 차가 견인되었다는 매우 사소한 일로 아이를 되찾는 일을 포기한다. 그녀에게 딸을 만나고, 되찾는 것은 간절하며 중요한 일이지만 그만큼 조심스럽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일단 저지르기'보다는 '다시 생각하기'를 선택한다.



     한수는 그녀의 실패를 목격하고, 바로 아이를 혜화의 집에 데려다 놓는다. 이는 아이와 함께 하고픈 혜화를 위해서, 아빠로서 아이를 그리워하는 자신을 위한 적극적인 선택이다. 이를 두고 그를 마냥 범범자로 몰아붙일 수는 없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다. 수많은 의견들이 쏟아진다. 트위터, 페이스북과 같은 미디어는 이러한 양상을 촉진시켰다. 강한 분노, 자책, 환희는 즉각적이다. 아프면 아프다고, 좋다면 좋다고 시시각각 말하는 문장들. 이러한 쏟아지는 말들은 자신의 아픔을 격렬하게 토로하는 '한수의 말'과 같다. 

 

        반면에 사건을 마주했을 때 '적절한 말'을 찾는데 고심하고 가장 이상적인 말(불가능한 말)을 하려는 시도가 있다. 그것은 문학적인 말(시적인 언어)의 형식을 갖는다. 오랫동안 숙성되는 시간을 견디고, 겨우 밖으로 나오는 말들이다. 이 말들은 온전히 현실을 표현하지 못하고 실패에 머무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세계에서는 무익한 것으로 취급당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가장 적절한 말을 찾기 위한 시도는 숭고한 성실성을 확보하며 끝까지 살아남아 향기를 전달하는 최후의 말이 된다. 




 영화의 마지막, 혜화는 사이드 미러에 비친 한수를 향해 후진한다. 몸부림치며 아픔을 표현했던 한수는 착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단편적이고 직설적인 큰 흔들림을 표현하며 아픔 앞에 섰다. 한수는 자신을 파괴하는 형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상처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몸짓이다. 

 

     담담하게 온전한 아픔을 마주해왔던 혜화는 결말에 마주한 충격도, 지금까지의 아픔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이는 '모성'이라든지 '여성'과 같은 식상한 가치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다. 이 힘을 바탕으로 혜화는 자신을 배신했던 한수를 끌어안는다. 혜화의 상처는 흉터로 남아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게 할 것이다. 그래도 살아갈 것이다. 혜화는 한결 같이 '최후의 말'을 준비해 왔다. 계속 '최후의 말을' 준비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한수는 결코 할 수 없는 '앵콜'을 외칠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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