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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귄일호 Dec 05. 2022

지나가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한국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한국에서 보낸 5주의 시간이 지났다. 분명 긴 시간 동안 일 걱정 없이 푹 쉬었는데 뭔지 모를 정신없음이 나를 얽맸다. 붙잡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는데 그러지 못할까 봐 불안한 마음이었을까 — 한국에 다녀오면 항상 이런 알 수 없는 마음이 든다. 아마도 오랜만에 그리운 사람들을 줄줄이 만나고 대화하고 경험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꼭 누군가를 만나고 나면 그때그때마다 다른 감정적 그리고 이성적인 자극에 노출이 되는데, 요즘엔 그걸 흘려보내는 게 너무 아쉽다. 특히나 혹시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할머니를 만나 대화가 없는 대화를 했을 때, 혹은 오랜 친구와 밤새 신나게 수다 떨고 놀고 나서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을 때 등등 그다지 특별할 것 없지만 흘려보내기 아쉬운 그런 순간들.







하루는 80이 넘으신 할머니의 손을 붙들고 말했다. “할머니, 지금까지 저와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주셔서 감사해요. 이젠 제가 할머니를 위해 기도할게요. “ 그러곤 할머니께 내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작년엔 분명 이름은 잘 불러주셨는데, 아마도 머리론 알지만 입 밖에 소리가 잘 나오지 않으시나 보다. 내 이름을 따라 해 보시라고 또박또박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그렇게 내 이름, 그리고 내 남편의 이름을 따라 불러주셨다. 순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할머니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계속해서 맴돌던 하고 싶던 말을 뱉었다.


“사랑해요 할머니 정말 많이 감사해요.” 말로 꺼내면 눈물이 툭 튀어나올까 봐 입 밖에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결국 눈물은 났고, 그는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함께 눈물을 찍 흘렸다.


그런 순간에도 우리 할머니는 별 대답이나 대꾸가 없으셨다. 다만 “어찌까”를 연신 외치실 뿐이었다.


세월이 느껴지는 할머니의 손과 그녀의 성경책



할머니를 뵈러 가기 며칠 전, 남편에게 부고 연락이 왔다. 그가 독일에서 인턴을 할 때 친해진 회사 선배였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급하게 한국에 들어오는 중이고 당장 내일 부산에서 발인이라고. 이 모든 과정은 생각보다 빠르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순간에도 외국에 사는 사람들은 먼 길을 긴 시간 동안 가야 한다. 장기 비행을 하는 시간 동안엔 비행기 엔진 소리말고는 고요한 적막이 흐른다. 그리고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다. 그 느린 시간을 견뎌야 한다니 벌써부터 자신이 없다. 




이번 한국행은 아빠의 생신에 맞춰 일정을 조정했다. 생신 기념 식사를 꼭 같이하고 싶어서. 아침에 도착해 나를 데리러 나와준 부모님의 차에 몸을 누이고 창 밖 하늘을 보며 멍을 때렸다. 엄마는 영국에서 온 나를 보고 “어머, 여기 귀여운 들고양이가 한 마리 있네. 얼른 집고양이로 변신시켜 줘야지!” 라며 애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분명 내가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 온 건데, 항상 주는 것보다 받는 게 더 크다.


이런 집고양이처럼 한국 갈때마다 날 변신시켜주는 울엄빠




엄마 아빠는 귀한 여름휴가를 울산으로 오셨다. 물론 맛있는 음식이 많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난 느낄 수 있다. 울산 시댁에 가있는 딸에게 부담 주지 않고 조금이나마 더 자주 많이 내 얼굴을 보려는 부모의 마음. 물론 식당을 시작해 고생하고 계시는 사돈어른들을 응원하고 우리와 다 같이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그 마음도 느껴졌다. 우린 식당의 점심 피크 시간이 지나 3-4시쯤 모였다. 서울에서 온 며느리와 그 가족이 좋아하는 대게를 넉넉하게 주문하신 시어머님은 혹여나 식을까 먹기 불편하진 않을까 고민하며 우리에게 전복과 대게의 조합인 최고의 식사를 내어주셨다.


전복과 대게의 조합, 최고다



울산 식구들은 한 마을에 모여 지내신다. 식당, 집, 카페에 아버님, 어머님, 외할머니, 삼촌, 세 이모들, 사촌 동생들이 있다. 울산 시내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긴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고불고불한 길이 나오고, 그 끝 바닷가에 전복 식당, 식당 뒷문에서 30걸음 걸어가면 집 마당, 그리고 다른 샛길로 10걸음 가면 카페가 나온다. 짭조름한 바다 냄새와 생선을 주로 먹고 컸을 길고양이들, 그리고 고기잡이 배들이 줄을 서있는 항구가 있다. 바다에서 멀리만 살아왔던 나는 이곳이 참 좋다. 회를 맘껏 사주시는 삼촌이 계셔서만은 아니다. 그냥 따듯하고 정감 있다. 어머님의 엄마인 울산 외할머니는 이 방 저 방 돌아다니시며 빨랫감을 찾으신다. 가족들의 양말을 모아 빨래를 하시고, 하나하나 마당 빨랫줄에 거신다. 할머니는 아침마다 방파제로 산책도 다녀오시고, 경로당 친구분들과 수다를 떨고 돌아오시기도 한다. 그리고는 큰 딸의 식당에 가서 점심 식사를 하신 후, 막내딸의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신다. 울산 시내에서 쭉 사셨던 시부모님이 이곳으로 이사를 결심하신 가장 큰 이유는 할머니였다. 직접 가서 지내보니 왜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 너무나 알 것 같았다.


정감있는 울산 집 앞마당


또 나의 아빠, 엄마는 이곳에 직접 와보시곤 내가 왜 시댁에 내려오는 걸 그리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고 하셨다. 서로의 시선과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꽤나 많은 것들이 이해되고 공감된다. 



이번 울산 시댁에서 가장 큰 화두는 우리 집 둘째 아들, 즉 남편의 동생인 도련님의 연애였다. 최근 연애를 시작한 그는 그녀에 대해 자주 얘기를 해줬다. 결혼을 빨리 하고 싶어 하던 그는 연애에 있어서도 꽤나 신중했다. 그렇게 신중을 기하더니 막상 연애를 시작하곤 마음이 내달리는 듯 보였다. 신중한 30대의 연애지만 우리 눈엔 귀여워만 보인다.



나에겐 두 명의 여동생이 있다. 그들은 고맙게도 항상 멀리 있는 우리 부부를 보고 싶어 해 준다. 그리고 고맙다고 표현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영국을 오기 직전 자매들끼리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어디 예쁜 곳을 찾아갈까 고민하다가 결국 동네 작은 와인바를 예약했다. 그러다가 와인바에 가기 전에 감자탕을 먹자고 갑자기 메뉴를 바꿨다.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둘째 동생인 그녀는 먹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오랜 시간 그녀와 지내온 나는 음식에 있어선 무조건 그 결정에 따른다. 이번에도 실패란 없었다. 그녀와 그의 남편이 자주 간다는 동네 작은 감자탕 집이었다. 식당 이름도 모르는, 그저 위치로만 기억하는 곳. 우리가 들어가니 식당엔 예약 식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도 지역 발전을 주로 담당하시는 어른들이 회식을 하시려는 것 같았다. 우린 와인바에 가기 전 후다닥 감자탕 중자와 당면, 라면 사리, 그리고 배추김치와 무김치 반찬들을 클리어했다. 몇 달이 지나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맛이 그립다.



막내 동생은 20대 초반 대학생이다. 어릴 적부터 재롱도 흥도 많더니 올해 작은 뮤지컬에 데뷔도 했고 최근엔 대학로 극단 뮤지컬의 주인공으로 오디션 합격도 했다. 노래하며 무대에 서는걸 행복해하는, 나랑 외모는 닮았지만 전혀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는 8살 어린 동생이다. 나는 해보고 싶은 것도 다양하고 꿈 많고 정 많은 내 동생이 덜 고생하고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인간관계든 진로든 고생하며 배운다지만 꽤나 나이 차이가 나는 큰언니가 되어보니 조금이나마 덜 힘들었으면 좋겠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예전 동생이 힘든 시기를 보낼 때 멀리 사는 나와 전화하며 말했다. 언제든 꼭 자기편을 들어줄 수 있겠냐고. 그래서 그런다고 의심의 여지없이 약속했다. 난 동생들에게 그런 언니가 되고 싶다고 종종 혼자 다짐한다. 묻고 따지지도 않고 편들어줄 수 있는 그런.



먹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는 바로 아래 동생은 나랑 많이 다른 성향이지만 그래서 더 잘 맞는 나의 친구다. 어릴 적 우린 같은 방을 썼고, 무서울 땐 옆에서 자주고 누가 괴롭히면 같이 욕해주는 둘도 없는 동지였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결혼하기 전 20대 초중반에 같이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신기하게도 싸우지도 않고 너무나 소소하게 즐거운 여행 메이트다. 20대 초반 겁도 없이 그녀와 단둘이 미국 서부를 자동차로 운전하며 여행했었다. 몇 시간씩 운전하며 노래를 듣고 잔잔한 수다를 떨었다. 하루는 그녀의 생일이었는데 정말 작은 바닷가 도시 몬트레이에서 하루 묵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짙은 파란색의 바닷가에서 케이크도 없이 나 혼자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운 좋게 그 순간을 영상으로 남겨두었는데, 작년 생일에 동생이 다시 보더니 눈물이 났다고 했다. 나도 다시 그 영상을 보니 왠지 모르게 눈물과 미소가 동시에 나왔다. 이번 영국에 오기 직전에는 동생들과 인사하고 씩씩하게 차에 타서 남몰래 눈물도 훔쳤다. 확실히 외국 나오는데 즐겁기만 하던 예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떨어져 지내는 만큼 더 소중한






외국에서의 삶은 쉽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소중한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생각과 감정이 남는다. 그리고 그 소중함이 해를 거듭할수록 가중된다.



행복했던 지난여름을 기록하니 또 한국에 가고 싶어졌다. 다음 방문엔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표현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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