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펭귄일호 Jul 08. 2022

임신, 출산, 이직, 이사 다 잘하고 싶어

욕심 좀 내면 안돼?


1. 지난 글을 기점으로 또 한 번 내 삶의 방향성이 달라졌다. 2. 임신과 출산, 육아가 내 인생에서 사라진 건 아니다. 3. 다만 출산 후 하려고 무작정 미뤄뒀던 이직, 이사, 이민에 좀 더 집중하게 되었다.




이렇게 글로 쓰고 보니 세 문장에 정리되는 게 황당하기도 하다. 지난 몇 달간 내 머리를 복잡하게 했던 수많은 주제들이 이렇게 간결하게 정리되다니. 모두 다 내가 처음 겪는 일들이라 걱정이 많았고 머리에 생각 조각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머릿속에 정리가 되었기에 이 조각들을 연결하여 기록해보려고 한다. 혹여나 비슷한 상황에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까, 아님 훗날 나의 자녀에게 “너의 엄마가 이런 생각을 하던 시절이 있었단다”하며 보여줄까 싶어서.




왜 나는 임신과 이직을 동시에 할 수 없을까


임신과 유산을 겪고 난 후,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졌다. 갑작스럽게 받은 선물을 이유 없이 뺏긴 느낌이었다. 뺏겼다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다시 되찾고 싶었다. 그래서 몸이 회복되면 바로 임신을 시도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일을 겪으며 남편과 떨어져 있는 상황이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는 없다는 것도 동시에 깨달았다. 사실 이 상태를 바꾸는 것이 가장 시급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의 이탈리아 지점에서 종종 일하면 안 되는지 문의도 해봤지만,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일도 임신도 놓지 않고 남편이 있는 이탈리아에 더 자주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두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1.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회사로 이직하는 것

2. 영국 런던에 있는 회사로 이직하되, 해외에서의 재택근무에 유연한 곳을 찾는 것



사실 작년 여름부터 링크드인을 통해 이탈리아 토리노나 밀라노에 있는 회사들 채용 소식도 알아보고는 있었다. 몇 번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다양한 디자이너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많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깨달았다. 디자이너로서, 특히나 파이낸스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디자이너로서, 영국 런던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엄청난 장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영국 런던을 아예 떠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나는 2번째 방법으로 이직을 준비했고,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지금, 곧 이직을 앞두고 있다.




사실 이직을 준비할 때 꽤나 신경 쓰였던 부분 중 하나가 임신 가능성이었다. 이직을 하려면 임신 가능성을 없애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인터뷰 보는 회사들의 육아휴직 제도도 미리 찾아보고, 만약 이직을 한다면 언제 이 제도를 온전히 누릴 수 있을지 날짜를 혼자 계산해보기도 했다. 아직 오퍼를 받기도 전인데, 그러려면 디자인 포트폴리오도 업데이트해야 하고 인터뷰도 수차례 봐야 하는데, 왜 내 머리는 벌써부터 복잡한 걸까. 왜 이런 걱정을 미리부터 하고 있는 걸까. 이 복잡한 머릿속 생각들을 꺼내어 이탈리아에 있는 남편에게 설명했다. 물론 지금 쓰는 글처럼 차분하게 정돈된 말이 아녔을 거다. 다만 내가 찰떡같이 말하면 콩떡같이 알아들어 주기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이해해주기를, 이해해주는 척이 아니라 제대로 공감해주기를 바랐다.



펭귄일호(가명)아, 일단 하나씩 차분히 해야 하지 않을까? 우선순위를 정하고 먼저 해야 할 일부터 해야지.



지금 되돌아보니 그렇게 서운한 말투는 아니었다. 근데 그땐 왜 억울한 마음이 들었을까. 임신은 나와 그의 공동 주제인데 나만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것 같아서였을까. 나의 풀리지 않는 고뇌와 답답한 이 마음을 심리적으로 보상받고 싶어서였을까. 당신보다 내가 더 심리적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생색을 내고 싶어서였을까. 이런 복합적인 마음과 생각이 섞이고 섞여 그에게 불똥이 튀었다.



이직 준비하며 열심히 여행다니던 이번 봄 (2022년 피렌체)



한참을 다투고 보니 나도 그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의미의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다툼의 순간엔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다. 나에게 생채기를 낸 날카로운 말투나 단어에 꽂혀버려 본질은 놓치고 만다. 다행히도 서운하고 복잡한 나의 마음을 쏟아내고 나니 큰 상처 없이 한결 후련해졌다. 그도 좀 더 자세하게 나의 상황과 마음을 이해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래 이거야! 그가 임신과 이직에 대해 해결점을 제시해주길 바란 게 아니었어. 다만 ‘유산’을 지나 ‘임신’, ‘이직’ 그리고 ‘이사’라는 꽤나 큰 주제들을 맞닥뜨린 나를 토닥거려주길, 내가 당장 닥친 일들을 자기 일처럼 고민하고 생각하고 표현해주길 바란 것뿐이다. 





그 흔한 사자성어, ‘역지사지’


가끔은 ‘넌 잘할 거야, 파이팅’이라는 말이 무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나 상대가 가까운 사람일 경우 더욱더 그렇다.



그보다는 상대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자세히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 내가 그 상황이라면? 내가 지금 당장 상대의 상황에 있다면? 뭐가 필요할까, 어떤 마음일까,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을까.



그런 다음 ‘내가 너의 입장을 이래이래 상상해봤는데, 이렇겠더라고. 혹시 이런이런 마음이야? 쉽지 않겠다.’라고 얘기해본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상대의 감정과 상황을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상상했다는 점을 꼭 주저리주저리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표현하고 제멋대로 해석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상대의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이만큼 사랑하기에 이런 역지사지의 상상도 해보며 널 응원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만난지 10주년, 2주만에 만나 편지 교환 (2022년 토리노)




유산이란 소식을 알고 그다음 날 아침, 그는 바로 새벽 비행기를 타고 런던에 왔다. 문을 열어보니 그는 큰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10년 동안 받았던 꽃다발 중에 세 번째로 컸다. (첫 번째는 100일에 받았던 100송이, 두 번째는 프러포즈 때 받았던 꽃다발) 전날 울다가 잠든 잠옷 차림의 나를 꼭 안아주며 같이 울었다. 아마도 내가 아주 가 끔 중요한 날에는 꽃을 받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정신없이 공항에 서 내려 집에 오는 길에 꽃집을 찾았을 것이다. 그도 아이를 잃어 마음 아픈 상황에서 더 힘들 나를 생각해 무엇이 나를 웃게 할 수 있을까 찾은 것이다. 그 역지사지의 마음이 느껴져서 너무 고마웠다.



그와 나는 임신과 유산을 겪으며 같이 울었고, 서로 내 일처럼 이직과 회사 생활을 치열하게 해냈고, 이사는 분담하여 같이 해결했다.



그러다 보니 몇 달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던 복잡한 실타래는 그렇게 하나씩 풀렸다. 어느덧 현 회사를 퇴사하기까지 2주가 남았고, 여름엔 한국에서 가족들과 휴가를 보낼 수 있고, 그 후엔 돌아와서 이직을 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집도 이사를 해서 더 편안한 곳으로 옮겼다. 물론 임신과 출산, 육아와 일, 이민과 이직 등 수많은 굵직한 사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두렵지 않다. 날 이만큼 사랑하기에 역지사지의 상상도 하며 날 응원하고 있는 그와 한국에 있는 식구들, 친구들이 있으니까!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 감사해요.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을 입장 바꿔 상상하고 배려하는 그런 하루를 보내시길!

작가의 이전글 본 적 없지만 보고 싶은 아주 작은 우리의 아이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