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과 유산의 기록
작년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영국과 이탈리아를 한참 오가던 우리에게 갑자기 새 생명이 찾아왔다. 처음엔 둘 다 너무 놀라 ‘헐’을 연발했다. 우린 아직 준비가 안된 것 같은데 내년 이맘때 즈음엔 엄마 아빠가 되어있다니 아무래도 믿기지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실감은 나지 않았지만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는데도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빈 속에 커피만 들이켜던 내가 그릭 요거트에 그레놀라를 잔뜩 넣어 챙겨 먹게 되었고, 그 좋아하던 커피는 당기지도 않았다. 점심 저녁도 혼자지만 잘 챙겨 먹으려 애쓰고, 8월 한 여름이 예정일이라는 소식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걱정도 하고 기대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7-8주 즈음 처음 스캔을 보러 가는 길,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런던의 추운 겨울날이었다. 일정이 꼬여 스캔에 늦을까 봐 그와 나는 서로에게 예민하게 굴었고 그러다가 서운함에 지하철 안에서 티격태격 다투어 버렸다. 그렇지만 금세 그 누구 한 명의 탓도 아닌 부지런하지 못한 우리의 탓 그리고 비 오는 런던이 문제라 여기고 금방 화해한 뒤, 설레는 마음으로 병원에 도착했다. 너무나 다행히 1.5 cm 작은 우리의 아이는 위치도 좋았고 심장 소리도 좋았다. 첫 심장 소리를 들을 때, 그는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우린 처음으로 배 속의 그 작은 생명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실감하였다.
영국과 이탈리아도 오고 가며 행복한 연말과 연초가 지나 5주가 흘렀다. 그 사이 그와 나는 아빠, 엄마가 되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많이 된 듯했다. 혼잣말로 배를 어루만지며 태명을 부르기도 하고, 스스로 몸을 사리는 나의 모습이 어색하지만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큰 걱정 없이 방문한 12주 스캔에서 그 생명이 멈추었음을 너무나 갑작스럽게 확인했다.
남편은 이탈리아에 있었기에 나는 회사 점심시간에 영국 병원을 찾았다. 아기가 얼마나 컸을까 기대되는 마음, 입덧이 계속 없었기에 잘 있는지 모르겠어 답답하고 걱정되는 마음, 이런 걱정도 부정적인 것이니 아이를 위해 좋은 것만 생각해야 한다는 의지적인 마음, 하루빨리 시간이 지나 배가 나와서 아이를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 등등 수많은 마음들을 품고 햇살이 예쁜 어느 날 빅벤이 보이는 병원으로 두 번째 스캔을 갔다.
배 초음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 선생님의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했고 내가 봐도 지난 스캔보다 태아가 많이 크지 않은 것 같아 이상했다. 의사 선생님은 차분하게 하지만 마음 아파하며 나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했고, 나는 quiet room, 일명 조용한 방으로 옮겨졌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냥 멍했고 믿고 싶지 않았다. 설마 했는데 나에게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그 뻔한 말이 그대로 와닿았다.
그렇게 우리의 아주 작은 아이는 갑자기 우리의 곁을 떠나버렸다. 태어나 느껴본 적 없는 상실감이었다. 상실감이 무엇인지 허무함이 무엇인지 이렇게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꽤나 천진난만했던 나는 30살 언저리에 3개월 동안 품었던 태아를 떠나보내게 되었다. 눈에 눈물이 가득 찬 상태로 의사가 유산에 어떤 방법들이 있는지 설명해주는 내용을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방법과 부작용에 대해 잘 들어야 했고, 만약 수술을 한다면 예약은 언제 가능한지 물어야 하는 것도 바로 나였다. 떠나보내는 슬픔을 가득 안고 떠나보낼 방법을 결정해야 한다니…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회사에 연락해 상황을 설명하면서 급하게 병가를 쓰는 것도 내 몫이었고, 남편 역시 그 자신의 슬픔을 돌아볼 여력도 없이 날 위로하고 회사에 상황을 설명한 뒤 그다음 날 바로 비행기를 타고 왔다.
슬픔을 있는 그대로 다 누리면 일상을 견디기 힘든 그런 날들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럴 때면 마음 한편에 슬픔을 밀어 두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본다. 그러다 보면 그 슬픔은 잊히기도 없어지기도 한다. 가끔 들여다보면 여전히 슬프지만 그걸 덤덤하게 말할 정도가 된다. 그 정도면 꽤나 극복이 된 게 아닐까 싶다. 예전엔 슬픔에 대처하는 이런 방식이 문제를 회피하는 것만 같아서 별로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아마도 슬픔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던 철없던 나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아주 작은 아이를 떠나보내고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몸과 마음을 잘 추스르라는 말이었다. 엄마와 남편이 해주는 미역국을 원 없이 먹었고 병가도 낼 수 있었으니 몸은 꽤나 빠르게 회복이 된 것 같다. 아마도 이 글을 울지 않고 덤덤하게 쓰고 있는 걸 보면 마음도 많이 회복이 된 것 같다.
슬픔과 상실감의 그 경험도
내 삶에 소중한 한 조각임을
이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탈리아에 나는 영국에서 매일 디자인을 하고 퇴근길에 통화하며 하루를 정리하는 그런 일상. 다음 휴가를 계획하며 하루빨리 그날이 오길 기다리는 그런 일상. 그렇게 별다를 것 없는 하루가 흘러간다. 그러다가 문득 지난 겨울을 생각해본다. 아주 작은 아이를 내 몸에 품고 행복했던 일상들을. 유산의 슬픔에 가려 행복했던 우리의 그때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싫다. 그리고 슬픔과 상실감의 그 경험도 내 삶에 소중한 한 조각임을 잊지 않고 싶다.
요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유산을 겪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슬픔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위로 역시 고맙지만 사실 크게 와닿지 않았다. 내 잘못이든 아니든 이런 일을 겪고 있어 힘든 건 바로 나니까. 가장 힘이 된 위로는 씩씩하게 덤덤하게 일상을 살려고 애쓰고 있는 나를 대신해 울어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던 나에게 소소한 대화를 걸어준 사람들이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고 내 사람들 역시 겪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지만, 혹여나 누군가가 이런 상실감을 겪고 있다면 같이 울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