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차 부부에게 찾아온 시련이자 기회
앞서 브런치 북에서 나눈 것처럼 나와 그는 결혼 5년 차에 영국과 이탈리아에 떨어져 살게 되었다. 나는 영국 런던에서 그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두 집 살림을 시작한 지도 5개월이 되었다. 그동안 그가 2번 런던에 왔고, 내가 2번 토리노에 갔다. 아주 짧은 주말의 만남은 우리에게 참 밀도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함께 붙어있는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까워 서로에게 애틋해지는 매우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물론 일에 지쳐 함께 요리하며 스트레스를 풀고 싶을 때, 춥고 어두운 저녁 퇴근하고 집이 너무 추울 때,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있을 때 등 허전한 순간이 많지만.
우리 둘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간다. 그는 아침 7시 반쯤에 출근길에 나선다. 12월 유럽의 아침은 참 어둡다. 종종 붉은 아침 햇살이 예쁠 때엔 사진을 찍어 자고 있는 나에게 카톡을 보낸다. 그와 나의 시차는 1시간. 그가 출근할 때에 나는 6시 반이라 한참 잘 자고 있을 때다. 재택근무냐 오피스 출근이냐에 따라 일어나는 시간이 달라지는 나는 그보다 늦게 일어나 출근을 하며 그와 카톡을 한다.
그렇게 그와 나는 각자의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디자인 팀이라 그런지 그도 나도 동료들의 국적이나 배경이 다양하다. 매일 각자의 커피타임에서 지난 주말 무얼 했는지 이야기하고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연다. 지난 주말에는 마트에서 재료를 사서 따듯한 와인을 함께 만들어 마셨다. 감기 기운이 있는 그를 위해 몸을 데워줄 쇠고기 미역국도 함께 먹었다. 아마도 지금쯤 그는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가 어떤 주말을 함께 보냈는지 이탈리안, 아이리쉬, 멕시칸, 노르웨이 동료들에게 설명하고 있겠지.
일이 많은 그는 저녁 7시 즈음에 나는 같은 시간인 6시에 퇴근을 한다. 그가 일을 먼저 시작하는데 끝나는 시간이 비슷하거나 더 늦을 때면 왠지 모를 안쓰러움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퇴근길 전화는 기분이 좋다. 오늘 하루 회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동료 누구누구가 이런 얘기를 했고 저런 디자인을 했고, 기분이 좋았고 나빴고 등 소소한 대화가 오고 간다. 오늘 저녁엔 무얼 먹을 건지, 서로 만나지 못하는 이번 주말엔 친구 누구를 만날지 조잘조잘 수다를 떨다 보면, 1시간은 뚝딱이다. 그리고 요리를 해서 서로 사진을 보내주고 각자 보고 싶은 유튜브나 드라마를 보며 식사를 한다. 그러다 보면 야속하게도 저녁 시간은 너무나 빠르게 끝난다. 곧 잘 준비를 할 시간이다. 이런.
종종 주변 사람들이 얘기한다. 부부가 떨어져 있으니 허전하고 힘들긴 하겠지만, 각자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겠다고! 떨어지기 전 작년에는 함께 살지 못하는 게 너무나 걱정이 되었는데, 지내고 보니 맞는 말이다. 나도 그도 각자의 시간이 생겼다. 그리고 독립적으로 자신의 일상을 오롯이 살아내는 여유가 생겼다.
최근 많은 부부나 연인들이 초반 허니문 기간이 끝난 후 소소하지만 반복적인 일상을 함께 지내는 때에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해외든 국내든, 아이가 있든 없든, 회사를 다니든 아니든, 누구에게나 이런 시기는 존재한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다. 처음 결혼을 하고 영국에 왔을 때, 참 많이 싸웠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가계 관리에 대한 가치관이나 생각의 차이까지 다툴 지점들이 너무 많았다. 많은 결정은 함께 내려야 하는데, 서로에 대한 관심과 시간은 더 줄어가는 것만 같았다. 상대가 무엇을 먹고 싶은지, 생일 때 집에서 미역국을 먹으며 케이크를 불고 싶은지 아님 멋진 식당에 가서 사진을 찍고 식사를 하고 싶은지, 어떤 데이트를 하고 싶은지, 요즘 고민은 무엇인지 등 연애 초반엔 궁금했던 것들에 무심해졌다. 그래서일까 서로에게 더 서운하고 서러웠다.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관계에 돌입하면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서로에게 헌신을 요구하게 된다. 아이를 낳고 키울 때에는 당연히 더 큰 헌신과 희생까지도 필요하다. 게다가 우린 남녀가 가정과 일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도맡아서 했던 그런 시대에 더 이상 살고 있지 않다. 나도 그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쭉 회사원으로 살고 싶지 않더라도 누구든 자신의 일을 하고 싶은 건 당연하다. 아이도 낳고 키우며 글을 쓰고 대학원도 다니고 싶고, 디자이너로서도 계속해서 성장하고 싶다. 어떤 사람은 아이를 키우며 동화작가인 자신의 꿈을 실현하고 싶기도 하고, 육아휴직을 쓰고 회사로 복직하고 싶기도 하고, 자신이 원하는 회사로 이직이 하고 싶기도 하다. 요리와 청소는 각자 잘하는 사람이 하거나 잘 분담해서 담당하면 된다. 이 많은 일을 해내려면 각자의 독립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러려면 서로의 헌신이 필요하다.
독립적으로 혼자 일상을 잘 살아낼 줄 알아야, 함께도 잘 지낼 수 있다. 서로에게 철저하게 헌신하면서도 독립적인 관계. 그래서 서로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관계. 그러려면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울타리의 크기가 다 다르다. 타인이 그 울타리를 함부로 넘는 것은 불편하고 힘들다. ‘사랑하는 관계니까, 가족이니까, 우리 사이에 울타리가 어디 있어.’라고 어물쩍 넘어가면 안 된다. 서로의 울타리 안 공간을 확보해 주어야 한다. 그때를 잘 넘어왔기 때문에 지금 웃으며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지만, 이런 시기는 언제든 또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또다시 살림을 하나로 합칠 때, 아이가 생길 때, 이직을 할 때, 또 다른 나라로 이사를 할 때 등 수많은 변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런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다.
꽤나 오래 만났고 (10년 차) 고집이 센 나와 그는 말다툼을 잘 피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시행착오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안다. 그리고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좁힐 수 없는 간극을 가진 관계들도 많다는 것을 많이 듣고 보는 요즘이다. 그래서인지 포기하지 않고 이런 시기을 지나고 있을 누군가를, 당신을, 응원하고 싶다. 상대가 나의 손을 잡고 마음 편히 제 몫을 다 해낼 수 있도록, 맘껏 춤을 출 수 있도록 꿋꿋하게 버텨주고 있는 나에게 그에게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관계가 어려운 건 당신 혼자가 아니라고.
너무나 잘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