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여행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졌다
요즘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많이 보고 있다. 범죄 영화를 보는 것처럼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있으니 조금 죄책감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액트 오브 킬링, 침묵의 시선 같은 다큐멘터리는 예전부터 몹시 좋아하던 것이었고 최근에 본 김군, 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런 영화를 보면서 영화적인 재미를 찾는 것이 괜찮은 일일까? 다시 태어나도 우리, 를 보면서는 엄청 울었다. 다시 봐도 많이 울 것 같다. 그 어린 큰스님과 나이 든 제자 스님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심지어 아마존의 눈물, 같은 다큐멘터리에도 그렇게 내가 있는 다른 공간과 다른 시간, 다른 사람들이 나온다. 어렸을 때처럼 동물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많이 보고 있지는 않은데 (역시 나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매니아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BBC의 다큐멘터리는 대단한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자주 했던 생각들, 아프리카에서 사자를 돌보는 곳에 취직할 거야, 그리고 치타랑 표범에게 고기를 주면서 같이 살 거야, 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돌고래를 돌보는 일을 할 거야, 나는 수영을 잘 하니까 물 속 생물들을 돌봐주는 일을 할 거야, 라고 다짐했던 것을 떠올리기도 한다.
아무튼, 이런 저런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저기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얼마 전 여행을 다녀온 뒤로 뜨거운 태양에 대한 갈망이 강해졌다. 사실 가장 즐거운 햇볕이란 위도가 높은 유럽 북쪽 지역에서아등바등 쬐는 햇볕이다. 파리 정도면 엄청나게 양호해서, 강에 나와 햇볕을 쬐는 사람들이 유난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핀란드 헬싱키 같은 곳에서, 분명히 아직 날씨가 추운데도 불구하고, 해가 길어졌다는 것을 핑계로 어떻게든 햇볕을 쬐기 위해 그 차가운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비키니를 입은 채 드러누워 있는 사람들을 보자니 너무 귀여웠다. 브뤼셀의 플라지 호수는 그야말로 일광욕을 위한 장소여서, 날씨만 좋으면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비타민을 합성하기 위해 애처롭게 나온다. 분명 추워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야외에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추워하는 것 같은데 외투를 벗고 잔디밭에 눕는다.
그런 풍경들은 참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아기 고양이나 강아지를 보는 기분이 들게 한다. 여기저기의 바다에 다녀왔고 나도 “이렇게 추운데 벌써 서핑을 하러 왔어?”, “사실 지금 비시즌이라 이 수트도 추워”라는 말을 들으면서 포르투갈에서도 서핑을 했고 네덜란드에서도 서핑을 했다. 겨울의 북인도 날씨란 어떤 것인가 혹독하게 체험했고(겨울 인도 여행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여름의 시칠리아가 어떤 곳인지도 알았다.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 많지만 그래도 많은 곳을 돌아다녔고, 잠시 살았고, 여행했다.
이번에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길은 네 시간 반 동안 고스란히 난기류와 동행하는 길이었는데, 나는 내가 비행 일정을 고집한 탓에 엄마와 내가 이 비행기에 탔다고, 제발 비행기가 추락하더라도 동생이 나를 원망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여행자보험을 들고 갔으므로 아마 비행기가 추락했어도 동생이 나를 원망하지는 않고 그냥 아, 언니가 그래도 여행자보험 중에 프리미엄을 들고 갔구나 감사하다! 라고 말할 거라고 했다. 비행기 안에서 죽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무섭다. 익사와 화재와 비행기 사고 중에 고르라고 하면 그래도 비행기 사고를 고르겠지만, 내가 내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이 한정된 공간에 갇혀 있다는 것 자체가 고문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세계 공항을 돌아다녔다. 자칫 다른 사람들은 내가 비행기를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오해하겠지만 나는 기차도 버스도 갑갑함을 견디지 못해 잘 못 탄다. 그러니까 이건 단지,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욕구가 과도하게 크기 때문에, 그 욕구가 두려움(과 끔찍할 정도의 지겨움)을 망각하게 할 정도로 크기 때문에, 그렇게 돌아다녔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다녀온 곳들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졌다. 이제는 여러 이야기들, 가슴 따뜻해지는 풍경들에 대해 떠올리면서 쓸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생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