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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즐 Feb 05. 2020

태양의 아이

겨울 발리 여행


좋은 여행지에 가면 그곳에 대해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아진다. 그곳을 누군가에게 빼앗길까 봐 두려운 것이다. 나는 남들에게 벨기에 얘기는 실컷 하면서, 겐트가 얼마나 아름답고 브뤼헤는 얼마나 부자 냄새 풀풀 나는 동네인가 얘기하면서 (여러분, 브뤼헤와 겐트는 정말 좋습니다) 시칠리아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안에 조용히 갖고 있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곳들이라서 한번씩 충동적으로 그런 곳들에 대해 아주 긴 이야기를 길게 길게 늘어놓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도 인정한다. 사실, 나 빼고 다 알아, 에 가까운 유명한 여행지라서 굳이 입을 다물고 있을 필요도 없는 곳들이지만 말이다.


발리에 다녀왔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많이 탔다. 예전에 발리와 시칠리아를 고민하다가 시칠리아에 다녀온 일이 있었는데, 이번엔 고민 없이 바로 발리로 갔다. 언제나 가고 싶은 곳이었고 또 살고 싶은 곳이었다. 내가 살고 싶은 곳들의 공통점은 모두 적도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고, 또는 적어도 아주 혹한의 추위는 없으며 결정적으로 바다와 매우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다. 팔레르모와 시라쿠스는 정말 너무나 좋다, 그런데 서핑하는 바다는 없다. 쿠바, 안 가봤지만 정말 좋을 것이다, 근데 스페인어를 못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생각만 해도 환상적이다, 근데 겁나는 부분도 있을 것 같다. 포르투갈은 언제나 완벽한, 나의 멋대로 정해둔 제2의 고향이다(포르투갈 사람들은 상당수가 완벽한 프랑스어를 구사한다!). 인도네시아 발리, 난 인도네시아어도 못 하고 발리어도 못 하는데 단지 그곳이 남반구이며 적도에 가깝고 강렬한 파도가 있다는 이유로 그곳에서 서핑샵을 운영하면서 요가 스튜디오를 열고 있는 나를 상상하곤 했다.


이번에 간 곳은 짱구와 스미냑, 우붓이었다. 짱구 해변은 정말 아름다웠고, 끝없이 길었다. 바닷뱀도 있었다. 누군가 용감무쌍하게 그 바닷뱀을 잡아서 돌구멍에다 넣어주었다. 해가 넘어가는 모습을 몇 번 보았고, 얼굴에 주근깨가 올라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맨얼굴로 스쿠터를 탔다. 빨리 장롱 면허를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 나는 자전거도 제대로 못 타는 어른이 된 걸까? 맛있는 음식과 술을 먹었고 햇볕 아래에서 책을 읽었다. 자외선도 칼로리도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것이 제일 좋았다.


그래서 나는 그곳으로 다시 가고 싶다. 정말로 상상 속에서처럼 거기서 지내고 싶다. 내가 그리워하는 곳은 하나같이 내가 용감해질 수 있었던 곳들이다. 한여름의 핀란드, 초여름의 이탈리아, 봄의 프랑스와 겨울의 발리. 적어놓고 나니 나는 추위에 엄청 약하고 햇볕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식물형 인간임에 틀림없다. 나의 고양이도 같이 가면 좋아할 것이다, 그런 따가운 햇볕에 몸이 따땃해질 때까지 누워있는 고양이이니까. 언젠가는 갈 수 있을 거야,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라고 나는 사진을 보며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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