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용선 Sep 14. 2019

이면우 시 ‘술병빗돌’

핏줄로 세운 비석

  그 주정뱅이 간경화로 죽었다. 살아 다 마셔버렸으니 남은 건 고만고만한 아이 셋. 시립공동묘지 비탈에 끌어 묻고 돌아 나오는데 코훌쩍이 여섯 살 사내애가 붉은 무덤 발치에 소주병을 묻는다. 그것도 거꾸로 세워 묻는다.      

  그거 왜 묻느냐니까 울어 퉁퉁 분 누나들 사이에서 

  뽀송한 눈으로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중에 안 잊어버릴라구요.      


    



  술을 얼마나 좋아했으면, 술 마시고 나서 행동이 얼마나 개차반이었으면, 사내는 고만고만한 아이 셋만 남겨 놓고 죽을 때 남긴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재산도 없고 아내도 없고(달아났겠지) 건강도 남지 않았다. 시인은 이 상황을 ‘살아 다 마셔버렸다’고 쓴다. 

  제사 드려줄 아들을 남겼으니 이웃들과 친지들은 화장火葬을 할 수 없었을 게다. 장례비도 십시일반 이웃들이 모은 돈으로 마련하지 않았을까 싶다. 시신은 그 이가 살던 도시에서 운영하는 값싼 공동묘지에, 그것도 좋은 자리는 얻지 못하고 비탈진 자리에 묻는다. 살았을 적에 술로 나가떨어진 몸을 질질 끌어 방에 눕히기를 얼마나 했기에 시신을 묻는 모습을 ‘끌어’ 묻었다라고 표현할까. 

  아들은 여섯 살, 영양상태가 좋지 못한지 요즘 아이답지 않게 코훌쩍이다. 아이가 무덤 발치에서 뭔가를 하고 있다. 돈이 부족해 때도 입히지 못해 흙빛으로 붉은 무덤이다. 무덤 발치의 흙을 고사리 손으로 파서 소주병을 묻고 있다. 무덤 속 아버지에게 술을 따라드리는 걸까? 술병 주둥이가 무덤 속으로 향하게, ‘거꾸로’ 묻고 있다. 

  “얘야, 그건 왜 거기 그렇게 묻는 거니?” 

  장지葬地에 온 누군가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 양 옆에 서 있는 여자 아이 둘은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지만, 술병을 묻다 고개를 돌리는 사내애의 눈은 보송보송하다. 죽음의 의미를 모르는 눈. 어른들이 울고 누나들이 울면 영문 모르고 따라서라도 울 법 한데 아이는 이미 이 비슷한 상황에 만성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질문한 어른을 ‘보면 몰라요?’ 하는 눈빛으로 ‘빤히’ 올려다보며 아이가 대답한다. 

  “나중에 안 잊어버릴라구요.”

  에라, 이 몹쓸 인간아. 다른 집 아이들 어린이집 다니고 한글나라도 하면서 제 아비어미 이름 석 자쯤은 네댓 살만 먹어도 척척 써대는 요즘 세상에 아들이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것이라곤 오직 하나, 다 마셔버린 빈 술병뿐인 게다. 

  비석 하나 변변히 세우지 못한 붉은 무덤 발치에 핏줄 하나 구부리고 앉아 비석을 세우고 있다. 그래서 술병빗돌이다. 


이면우 시인. 1951년 대전 출생. 시집으로 <저 석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등

매거진의 이전글 김기택 시 ‘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