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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용선 Sep 14. 2019

이면우 시 ‘화염경배’

직업 사랑

보일러 새벽 가동 중 화염투시구로 연소실을 본다

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 살렸다

밥, 돼지고기, 공납금이 다 저기서 나왔다 

녹차의 쓸쓸함도 따라 나왔다 내 가족의

웃음, 눈물이 저 불길 속에 함께 타올랐다   

   

불길 속에서,

마술처럼 음식을 끄집어내는 여자를 경배하듯

나는 불길처럼 일찍 붉은 마음을 들어 바쳤다

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고 서늘하다

나는 나지막히 말을 건넨다 그래, 지금처럼

나와 가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     


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     



     

  머리에 뭐 좀 들었답시고(들었나?) “직업!” 하면 연상되는 낱말이 일찌감치 ‘자아실현’이었다. 그 말을 나름대로 ‘나답게 사는 것’이라 해석해 놓고는, 자아실현 하며 살아 보겠다고 주위 사람들 참 어지간히도 괴롭혔다. 하필이면 나답게 하는 것들 목록 가운데 돈은 한참 아래에 있었다. 남들은 집 샀다 땅 샀다 통장에 얼마 모았다 하는데 너는 어째,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나는 내 몸을 살게 해준 직업들을 템포러리 운운하면서 감히 깔보며 살아왔다. 이면우의 ‘화염경배’는 나 같은 철딱서니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철든 시편이다. 

  어느 날 새벽, 보일러 수리공이었던 이면우 시인은 보일러를 가동하며 화염투시구를 통해 연소실을 보다가 문득 생각에 잠긴다.

  '아, 저 불길은 얼마나 고마운가! 이 직업 아니었던들, 학력도 형편없고, 주변머리도 없는 나 같은 사내가 어떻게 아내와 자식을 이만큼이나마 거두었을까? 저 불길 덕택에 밥을 먹었고, 가끔씩 고기를 먹었으며, 자식들의 공납금을 낼 수 있었고, 쓸쓸한 날 싸구려 녹차라도 마실 수 있었던 게지. 쥐꼬리만 한 급여를 나도 아끼고 내 처자도 아끼며 때로 행복한 웃음을 짓기도 했고 아쉽고 쓸쓸함에 눈물 적신 적도 많았다. 내게 음식을 만들어 주어온 저 불길이 마치 내가 믿어야 할 종교 같구나. 보아라, 그 안에는 마치 여사제라도 들어있을 것 같구나. (집에 두고 온 아내 생각도 잠시 났을 터이다.) 보일러여 감사하다. 불길이여 참으로 고맙구나. 내 앞으로도 한 동안 더 네 신세를 지어야 하겠다.' 

  그리곤 시인은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죽고 나선 화장을 해야겠어. 내 몸을 불에다 바치는 그것 아니곤 또 달리 어떤 방법이 있어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그렇게 태어난 시였을 게다. '화염경배'는.

  자신과 주변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 자기 직업을 사랑하기. 



이면우 시인. 1951년 대전 출생. 시집으로 <저 석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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