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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용선 Feb 10. 2022

하느님의 아들이란 표현

 기독교회가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복음서의 성립 순서는 마르크(70년경)가 제일 먼저, 마태(80~90년)와 루가(80~90년)가 비슷한 시기, 요한(90~100년)이 가장 나중입니다. 복음서의 이름은 최초 집필자로 추정되는 이의 이름을 따른 것입니다. 마르크의 복음서는 언행록이고, 마태와 루가의 복음서는 전기문입니다. 기독교의 초기 교리가 어느 정도 정립되었을 시기에 쓰인 요한의 복음서는 종교 색채가 가장 강하며 평전 형식을 띱니다.

  각 복음서에서 예수의 정체성이 가장 처음 언급된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 (1:1)

  마르크: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1:1)

  루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 (1:32)

  요한: 태초에 로고스(Logos)가 있었다. 로고스는 하느님과 함께 있었으며, 로고스가 곧 하느님이셨다. 이 로고스가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1:1, 14)     


  * 로고스는 그리스어입니다. 한국어 성서에는 말씀으로, 영어 성서에는 Word로 각각 번역되어 있습니다. 철학에서 이성(理性)이란 뜻으로 사용하는 이 낱말은 ‘신은 물질과 직접 접촉할 수 없다’는 그리스 사상을 반영합니다. ‘로고스 엔디아데토스’(영원하신 하느님 안에)와 '로고스 프로포리코스'(창조에 쓰이고 적용된)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영계와 물질계를 완충하는 신의 수단이자 일부가 로고스입니다. 하느님의 로고스가 사람이 되어 인류 앞에 나타났다고 믿는 크리스천에게 로고스는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신약성서의 복음서가 마태, 마르크, 루가, 요한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보니, 신약성서를 처음 읽는 사람들은 마태복음 1장의 장황한 족보를 제일 먼저 마주치게 됩니다. 한편, 루가는 예수와 요한의 출생을 먼저 서술하고 세례자로서 활동하는 요한에게서 예수가 물로 세례를 받는 장면을 묘사한 뒤에 비로소 예수의 가문 즉 족보(루가 3:23-38)를 소개합니다. 마태의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해 다윗을 거쳐 예수까지 내려와 끝이 나고, 루가의 족보는 예수의 아버지로 알려진 요셉으로 시작해 다윗과 아브라함을 거쳐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다(Adam, the son of God)”(루가 3:38)까지 올라가 닿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구세주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메시아는 히브리어 동사 ‘masih(mashiah)’에서 온 말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스어에선 Christos(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강대국 블레셋 즉 필리스티아인에게 시달리던 조상을 구원해 왕조를 수립한 다윗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아입니다. 예수의 족보와 출생 이야기에는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며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유대인의 오래된 신앙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 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세계 질서의 중심이어야 세계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강요된 평화였습니다. ‘영광’이란 말도 신격화된 로마 황제를 추앙하여 지칭할 때만 사용하는 말이었으며, ‘구원의 기쁜 소식’은 황제의 후계자가 탄생했음을 알릴 때 사용하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시절에 다윗의 고향에서 평화와 영광의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무장봉기만 아니었다 뿐이지 이러한 용어 사용은 명백히 로마 제국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행위였습니다. 


  “하느님한테 아들이 있어? 유일신인데 아들이 있으면 더 이상은 유일신이 아니니까 모순 아닌가?” 성서를 읽으면 반드시 품게 되는 의문입니다. 고대 유대인의 가치관과 풍습 및 예수의 출신을 종합해서 알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므로, 현대인이 그러한 의문을 품는 건 아주 당연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표현은 예수에게 처음 적용된 것은 아닙니다. 구약성서 저자들은 하느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을 줄기차게 사용합니다. 

  “하느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여자들을 골라 모두 아내로 삼았다.”(창세기 6:2)

  “하루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여 와 주님 앞에 섰다. 사탄도 그들과 함께 왔다.”(1:6. 2:1)

  “아침 별들이 함께 함성을 지르고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두 환호할 때에 말이다.”(욥기 38:7)

  “하느님의 아들들아, 주님께 드려라. 영광과 권능을 주님께 드려라.”(시편 29:1)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주실 것이다.”(지혜서 2:18)

  “어떻게 하여 저 자가 하느님의 아들 가운데 들고 거룩한 이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게 되었는가.”(지혜서 5:5)

  이처럼 신구약의 성서 저자들은 하느님께서 창조한 영적 존재들에게도, 하느님께서 손수 빚어 숨을 불어넣은 아담과 그 후손에게도, 인간 여성의 태에 잉태시켜 낳은 예수에게도 공히 아들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신실한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아들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구약성서를 상당 부분 공유하는 유태교와 무슬림이 ‘하느님의 외아들’이란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이해할 만합니다. 

 

  요한을 비롯한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예수에게 외아들(독생자)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첫째, 로고스(Logos)의 특징인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존재’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친아들이란 뉘앙스로.

  둘째, 황제가 왕자의 출산을 알릴 때 사용하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기 위함.

  셋째, 성서에 아들이나 아들들로 지칭된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함.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예수가 남녀의 성적교합이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기술합니다. 의학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조물주 하느님의 로고스가 인간 여성의 난자와 결합하여 정핵의 역할을 함으로써 생식세포분열을 하여 태어난 인간이 바로 예수라는 뜻입니다. 동정녀 잉태는 구약성서의 예언과 밀접합니다. 사실 예수가 요셉과 마리아의 부부관계로 태어났다고 해도 성령의 개입을 통한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가 뒤바뀌진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서가 남녀의 성관계에 대한 터부가 매우 강한 고대에 쓰인 문서임을 잊지 맙시다. 성교 외의 수단으로 신화적 인물이 출생한다는 이야기는 흔하디흔합니다. 특히 처녀 잉태는 성서보다 한참 앞선 시기부터 이집트 이시스 탄생 신화란 게 존재했으니 성서 저자들이 본땄을 가능성도 크죠.

 

  요셉이 친부가 아니라 양부이므로, 마태와 루가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작성한 족보를 통해 예수가 ‘혈통으로는’ 다윗의 직계가 아니라고 증언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신과 같은 본질을 지녔으며 다윗 가문에 속했다는 두 가지 증언에 이어, 어쩌면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증언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가난하지만 위대한 어느 평신도 여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유대 임금 헤로데에게는 당시 스무 살 전후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를 비롯한 자식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귀에 민중이 기다려온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권력을 세습해온 헤로데 가문에게 민중의 지지를 받는 정적만큼 무서운 존재가 또 있을까요? 그가 왜 히브리 아기들을 학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헤로데 대왕의 유아 학살 기록에는 이견도 있습니다. 헤로데의 아들 가운데 유다(남부)와 사마리아(중부) 등지를 통치한 헤로데 아르켈라오스가 바리사이파 유대인들이 일으킨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3,000여명을 학살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 탄생에 얽힌 영아 학살 전승은 이 사건의 혼동이라는 설입니다.

 

  예수의 탄생을 즈음하여 헤로데 대왕이 죽자 그의 아들들인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헤로데 안티파스 등이 왕위를 분할하여 계승했습니다. 그중 요단강 동쪽과 갈릴리 지방을 물려받은 안티파스는 세포리스라는 도시를 자기 영지의 수도로 삼고자 했습니다. 당시 민중 지도자 유다가 민중봉기의 거점으로 삼았던 곳으로서 나사렛에서 불과 6킬로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로마 군대에 진압되는 과정에서 초토화되었던 세포리스가 도시로 재건되자 목수를 비롯한 건축노동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요셉도 그들 중 하나였을 것이며 청년기 예수 또한 건축노동자로 일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기 전 예수의 청년기 행적은 성서에 없습니다. 서기 26년에 안티파스 영지의 수도가 세포리스에서 티베리아로 바뀌었고, 몇 년 뒤 갈릴리 지역 나사렛 출신 예수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그런 유추가 가능할 뿐입니다. 


  “저 사람 그 목수 아니야? 마리아의 아들이잖아.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는 형제간이고.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같이 다 여기서 살지 않아?”(마르크 6:3)

  가장 먼저 쓰인 마가의 복음서에 ‘마리아의 아들’이란 표현이 등장한 건 무슨 까닭일까요? 어쩌면 가장인 요셉이 식구들과 함께 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요셉이 건축현장에서 죽었는지 봉기에 가담해 싸우다 죽었는지 질병으로 죽었는지 전쟁터에 끌려갔는지 복음서 저자 모두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홀어머니 또는 홀어머니 슬하나 다름없는 가정환경에서 성장했을지도 모릅니다. 한편, 마태는 ‘목수의 아들’(마태 13:55)이라 적었고 루가는 ‘요셉의 아들’(루가 4:22)이라 적었습니다. 


  ‘마리아의 찬가(마그니피카트, Magnifikat)’를 보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신앙과 생활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원이신 하느님 생각하는 기쁨에 마음 설레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으니 이제부터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 전능하신 분께서 내게 큰일을 해주셨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시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셨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네.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바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시리라.”(루가 1:46-56)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잉태한 채로 ‘메시아에 대한 민중의 가치관’이 잘 드러나는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 부유한 자를 내치고 겸손한 자, 비천한 자, 굶주린 자를 구원하시는 분! 마리아의 노래는 그로부터 30여년(또는 40여년)이 지나 그녀의 아들이 군중 앞에서 참된 행복에 대해 설파한 산상설교(마태 5:3-12, 루가 6:20-23)에서 재현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인 예수의 출신 성분은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 창조주 하느님

  둘째, 다윗 왕가 

  셋째, 하느님밖에 달리 의지할 존재가 없는 비천한 사회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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