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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아무르 Mar 03. 2024

세상을 바꿀 영웅을 키울지도 모를 일

세상은 요지경이다. 기후변화로 이상기후가 나타나 가뭄, 폭염, 폭우가 전 세계적으로 발생했고 수많은 생물이 멸종하고 있다. 지난 10년간은 자연발생적인 멸종 비율보다 467배나 높은 속도로 생명들이 멸종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미세먼지 애플리케이션이 존재하는 세상에 산다. 숨을 쉴 수 없는 공기 속에 산다는 것을, 우리가 어릴 적엔 상상해 본 적이 있던가. 마스크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유행시킨 패션 소품 아니었던가. 몇 년 전 코로나로 마스크 소동을 치르고 나서는 마스크는 일상 소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마스크 쓴 사람들을 보면 아직도 생경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사람들 표정을 보며 그 사람이 보낸 하루를 상상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미세먼지 앱과 마스크가 일상 소품인 세상이라니. 그뿐인가. 뉴스를 보면 인간의 행동이었다고 믿고 싶지 않은 수많은 범죄 소식을 볼 수 있으며, 다양한 집단 간의 혐오 현상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대량생산이 지배하는 세상, 돈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 사회적 약자들이 착취당하는 세상, 전쟁이 존재하는 세상, 길에 사는 아이가 존재하는 세상. 이런 세상을 변화시키기에 나는 너무나 작고 힘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달걀로 바위 치기일 뿐인데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내놓겠다고? 정말로? 세상은 더 나빠지기만 할 텐데? 무슨 배짱으로?


그렇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배짱이 필요한 일이다. 작게는 나의 삶이 송두리째 (혹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잘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하고 크게는 이런 세상을 아이가 살만하게 바꾸어 보겠다는 용기가, 더 크게는 이 아이를 세상을 구할 영웅으로 키우겠다는 용기가 필요하다.


영웅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에 사랑을 더할 인간다운 인간만 되어도 성공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내가 먼저 행동해야 했다. 내가 채식을 지향하고 대량 생산품이 아닌 지역 소상공인의 상품을 사는 등 친환경적 소비를 시작한 건 불과 몇 년 전이다.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전례 없는 폭염을 겪으면서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구 환경이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지지는 않을 텐데 내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땐 어떨지. 지구는 메마른 사막이 되고 경제적 능력이 되는 사람들만 돔 안에 만들어진 제대로 된 환경에서 살면 어쩌나 싶었다. 망상 같지만 지구환경이 망가질수록 생존과 관련하여 돈의 논리가 더 강력해지리라 생각했다. 돈이 있는 자만이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게 되리라. 하긴 이미 시작되었다. 세상의 쓰레기와 오염물질을 발생시키는 공장은 주로 개발도상국에 가 있으니 말이다. 내 아이가 더 자랐을 때 그런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지구가 이 지경이 되도록 무엇을 했냐고 아이가 물으면 적어도 할 말은 있었으면 했다. (물론 지구가 그 지경이 되길 바라진 않는다) 그리고 이런 나의 생활 습관이 아이에게도 자연스럽게 젖어들길 바랐다. 천 주머니에 쌀을 담는 엄마를 보며, 매주 목요일 저녁, 거의 7-8kg이 되는 채소와 과일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유모차를 끌고 찾으러 가는 엄마를 보며, 엄마가 흙이 잔뜩 묻은 채소를 담는 동안 재활용할 수 있는 유리병을 생산자에게 돌려주고, 집에서 가져간 달걀판에 달걀 열두 개를 조심조심 담으면서, 그런 모양의 소비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했다. 어느 날은 엄마는 왜 슈퍼가 아니라 이곳에서 채소를 찾는지 궁금해하길 바랐다.


큰아이가 네 살일 때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


“엄마 뭐 해?”

“닭고기 썰어.”

“닭? Poule ? (프랑스어로 암탉이다.)”

“응”

“에이. 엄마 농담이지. 우리가 Poule을 먹는다고?”

동화책에서만 암탉을 본 아이가 옅은 분홍색 덩어리를 닭과 연결하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어. 농담 아닌데? 닭 맞아.”

“에이. 고기는 고기고 poule은 poule이지.”


아이는 그러고선 룰루랄라 뛰어가 놀이를 이어갔다. 나는 미국의 경우 매시간 100만 마리의 동물이 식자재가 되기 위해 도살되고 있으며, 인간이 10억 톤의 곡물을 먹어 소비하는 동안 또 다른 곡물 10억 톤이 동물의 먹이로 소비되고, 그렇게 먹여서 우리가 얻는 것은 1억 톤의 고기와 3억 톤의 분뇨라는 장황한 설명을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인용) 아이에게 하지는 않았다. 대신 아이를 데리고 환경 관련 전시에 다녀왔다. 거기서는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현재까지 인류가 지구환경에 미친 영향에 관해 다양한 전시를 볼 수 있었고, 공장식 축산에 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는 공장식 축산보다는 플라스틱이나 미세먼지, 동물 멸종에 관한 전시에 더 관심을 보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이는 어쨌든 전시를 보고 생각하고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전시를 다 보고 말했다.


“나는 앞으로 많이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


그렇다고 그 이후로 아이가 갑자기 물을 아껴 쓰고, 더 이상 맥도널드 너깃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 아이에게 세상을 알아가고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는 재료를 하나 주었다고 믿었다.


세상을 바꿀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을 존중하는 마음 또한 가져야 한다. 나는 페미니즘과 성인지에 관심이 있는데 그렇다고 내가 탈코르셋을 하고 머리를 싹둑 자른 건 아니다. 내게 페미니즘은 다음과 같다.


“페미니즘 정치의 목표는 지배를 종식하여 우리가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게끔 우리를 해방하는 것이다. 얼마든지 정의를 사랑하고,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말이다.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_벨 훅스_p.262~263>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 모두가 소수자이든 다수자이든 자신의 모양대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 아들이 분홍색 물통을 들고 학교에 갔다가 놀림받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걸로 의기소침해질 필요 없다고 말했다.


“네가 분홍색을 좋아하는 건 누군가는 초콜릿을 좋아하고 너는 안 좋아하는 거랑 똑같은 거야. 여자 색이나 남자색 같은 건 없어.”


하지만 아이는 놀림받는 게 더 두려웠는지 파란색 물통을 사달라고 말했다. 아이가 내 설명에 납득했든 하지 않았든 나는 아이 말을 들어주었다. 파란색 물통을 들고 학교에 가는 아이의 표정이 한결 편해 보였다. 그런데도 아이는 여전히 말한다.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은 사랑을 나타내는 분홍색과 즐거움을 나타내는 노란색이라고.


나는 아이가 세상의 모든 다름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존중할 수 있길, 나아가 그 가치를 타인에게도 전달할 수 있길 희망한다. 달걀로 바위 치기 일지라도 아이들과 손을 맞잡고 내가 용기를 낼 것이다. 세상을 바꿀 용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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