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은 신기하다. 사람의 이름을 지우고 호칭으로 부르는 순간 그 사람에게는 일반화와 편견이 씌워진다.
아줌마, 아저씨, 아빠, 엄마, 장녀, 장남, 둘째, 막내, 외동아들, 외동딸, 시어머니, 친정엄마, 사장님, 이모 등등.
이름을 가진 개인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호칭이 말해주는 집단의 특성 (이것도 사람들이 만든 편견이겠지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을 알아가면서 그 집단의 특성과 잘 맞는다고 여기면 ‘그럴 줄 알았어.’가 되고, 그 집단의 특성과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면 ‘조금 의왼데?’가 된다. 결국 사람을 판단하는 데 있어 호칭이 주는 특징이 기준이 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의 나는 나와 아줌마라는 호칭을 연결해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은 모두 나이를 먹고 나도 언젠가는 중년이 될 것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아줌마와 나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이를 먹었다. 중년이 되고 흰머리가 늘고, 피부가 처지는 것을 보며 나도 이제 아줌마 대열에 들어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줌마가 되었다고 느낀 가장 결정적 계기는 글쓰기 모임이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엄마는 갑자기 많은 취미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늘 집에서 살림하고 우리와 아빠 뒷바라지하느라 바쁘고 피곤했던 엄마가 운전을 배우고, 수영을 배우고, 요가를 하기 시작했다. 내게 엄마는 겁이 많고 집에 붙어있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었는데, 내 생각과는 달리 엄마는 두려움을 넘어서 이 모든 것을 배워나갔다. 늘 아빠 그늘에 가려 수동적이고 겁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지라 이렇게 용기를 내고 끝까지 해내는 엄마가 낯설었다. 나는 궁금했다. 엄마가 왜 갑자기 이렇게 취미생활에 열심인 거지. 어차피 면허 따도 운전은 아빠가 하고, 수영 배워봐야 바다나 수영장 가서 수영할 사람도 아닌데. 자식들이 많이 커서 시간이 남아 저런 것들을 하시나 보다. 나는 엄마의 배움 활동을 그저 가벼운 취미생활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개인의 꿈을 키워오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그것을 접은 40대 여자가 되어보니, 겁 많은 엄마의 운전 연습이나 수영 강습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한 취미생활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엄마는 직장에서 아빠를 만났다. 결혼과 동시에 당신 문화에 따라 아빠는 직장에 남고 엄마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이십 년을 아이만 키우며 살다가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자 기다렸다는 듯이 동네 통장도 하고 운전도 배우며 바깥으로 나갔다. 통장 일을 하는 엄마를 보고 나는 놀랐다. 내가 알던 엄마가 아니었다. 덕실여사는 사실 일 처리가 꼼꼼하고 대외활동에 활발하며 계획을 세우고 밀고 나가는 힘이 있었다. 엄마가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지금쯤이면 한자리했겠다고, 사업을 해도 잘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엄마가 이십 년을 집에만 있으면서 수많은 내면의 갈등을 겪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도, 아이들이 어느 정도 내게 시간을 주는 시기가 왔을 때, 그렇게 자기만의 것을 찾아 헤매다 글쓰기 모임을 만나게 된 것 같다. 모임에서 글을 쓰는 행위는 단순히 글 쓰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가능성을 찾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그 어떤 호칭도 붙지 않은 나를 발견하고 나로 남고 싶은 욕구의 발현 말이다. 엄마에게는 운전, 수영, 요가, 통장 일이 그런 것이었으리라. 시간이 남아서 하는 취미가 아니라 덕실이라는 개인을 다시 찾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었나 싶다.
세상의 모든 아줌마가 왜 그렇게 열심히 취미생활을 하는지 궁금했고, 그저 시간이 남아서라는 답밖에 찾을 수 없었는데, 아니었다. 다들 아줌마, 엄마, 아내라는 호칭 뒤에 숨어 있는 진짜 자기를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저는 그럼 이만, 엄마하러 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