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에 따르면 욕망과 욕구는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한다. 욕구는 순전히 생물학적 충동이자 신체 기관의 요구에 따라 등장했다가 충족되면 일시적으로 완전히 약해지는 것이다. 반면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억압하더라도 지속되며 영원하다. 욕망의 실현은 충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의 재생산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어린 아기의 배고픔은 욕구이지만 어머니에게 갈구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욕망이다. 배고픔은 충족될 수 있지만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욕망은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하는 것이다. (두산백과 참조)
문득 인생은 어쩌면 욕망하고 자기합리화하고 욕망하고 자기합리화하는 것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짜로,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럴 법도 했다. 한국의 부모님을 만나고 싶고, 차가운 프랑스 인들 엉덩이 좀 걷어 차주고 싶고, 직업을 찾아서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그런 욕구가 아니라 삶의 동력으로써의 욕망에 대해 생각하는데 구체적으로 답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다 싶었다.
그래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물으면, 막연하게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대답하게 된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이길래. 가장 기본에서 시작해 보자. 인간이 먹으려면 노동을 해야 한다.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지 않았던가. 지금의 나는 내 배 아파 낳은 두 아이와 넘의 배 아파 나온 제일 큰 아이 하나 그리고 집 안 구석구석을 돌보며 밥값을 하고 있다. 누가 돈을 주는 건 아닌데, 대신 숙식을 해결해 준다. 나쁘지 않은 거래 같지만 나만의 것이 없어 조금은 아쉬운 직업이다. 아, 딱 하나, 정말 딱 하나 좋은 점이 있다면 내 배 아파 낳은 두 아이의 귀여운 모습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함정은 내 안의 거대한 욱! 을 그 어떤 거름망도 없이 튀어나오게 하는 진상도 함께 볼 수 있다는 부분이다. 이건 오로지 자식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어쨌든, 삼천포에서 다시 돌아오면, 나는 이제 이 노동을 남에게 넘길 수 있는 시기로 가고 있다. 의무교육이 대신 돌봐준다고 하니 나는 콩나물처럼 자라는 두 아이 입과 내 입을 위해 다른 노동을 찾아봐야 한다. 여기서 의미에 관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노동을 통해 의미를 찾든 거기서 번 돈으로 의미를 찾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 내게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싶은가. 거창하게 말하자면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이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하고 싶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이 동물을 사랑하고, 인간이 자연을 사랑하면서 자기 행동에 책임 의식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이 올 수 있도록, 나는 비록 우주 속 작은 모래 알갱이일 뿐이지만 구르고 구르고 구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라는 알갱이가 하나 구르면 내 옆의 알갱이도 조금 구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장하지 않은가. 나는 안다. 이렇게 비장해도 구르다 자기합리화하고 구르다 자기합리화하면서 눈 감는 그날, ‘하, 뭐야, 아무것도 못 하고 가네.’ 할 것이라는 걸. 아쉽게도 혹은 다행히도 나는 하늘이 점지해준 영웅은 아니기 때문이다.
욕망에 관해 쓰다 보니 구체적으로 어떤 욕구가 생기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박사 과정에 도전해서 세상을 구할 영웅을 발견하고 싶기도 하고, 책을 쓰고 싶기도 하고, 많건 적건 월급 따박따박 나오는 일을 해서 환경에 도움이 되는 소비를 하고 싶기도 하다. 여러 가지 선택사항이 있으니 이제는 고르고 실행하는 일만 남았다. 헛, 겁 많은 내가 제일 못하는 거. 실행. 일단 겁에 질려 덜덜 떨기에 앞서, 의미 있는 삶에는 마음과 정신이 건강한 인간 키우기도 포함되니까, 아이들에게 많이 웃어주고 다정하기로 마음먹어본다. 이보게 강민영 씨 잊지 마시게. 육아는 세상에 사랑을 더하는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