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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아무르 Apr 13. 2024

엄마니까 느끼지 말아야 할 감정

나에게는 두 아이가 있다. 첫째는 내게 힘든 아이고 둘째는 비교적 수월한 아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지만 내게는 조금 더 아프고 덜 아픈 손가락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두 아이를 차별하는 건 엄마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여긴다. 나는 혼란을 느낀다. 나도, 아이들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이 궁합이 있는데 어쩌지. 솔직히 말하면 나는 첫째보다 둘째랑 더 잘 맞는 느낌인데. 물론 나는 어른이고 엄마니까 둘에게 공평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첫째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는 일에는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하다. 나로서는 이해하거나 참기 어려운 행동을 수용하려 노력해야 하고, 그것을 가지고 아이를 판단하지 않으려 애써야 한다. 나와 기질이 잘 맞는 둘째 아이와는 필요 없는 노력이다. 


엄마이기 이전에 나도 사람인지라 이렇게 노력하는 관계가 지치기도 한다. 잘 안 맞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관계, 긍정적인 감정 교류를 해야 하는 관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관계. 


첫째 아이를 낳기 전에는 엄마는 무조건 아이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아이를 힘겨워하고, 육아를 괴로워하는 엄마는 어딘가 잘못된 것이라고 믿었다. 책이, 영화가, 드라마가 그렇게 알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친정엄마가 부족한 엄마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이따금 화를 내고 신경질을 냈다. 엄마의 사정을 알지 못했던 나는 엄마는 글로 육아를 배운 사람, 그러니까 마음으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가 정해준 역할을 꾸역꾸역 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희생하고 보살폈다. 매일 늦는 남편을 대신해 혼자서 세 아이를 키우고 늘 정성스레 밥을 지었다. 집을 깨끗이 하고 돈을 아꼈다. 자신은 늘 뒷전이었다. 나는 그런 엄마가 고마웠지만, 엄마에게 포근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니 내게서 친정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늘 피곤하고, 희생하며, 신경질을 내는 친정엄마가 내게도 있었다. 나는 놀랐다. 어렸을 때 싫어했던 엄마의 모습을 내가 하고 있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러고 있었다. 그러면서 친정엄마의 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가 굳은 얼굴을 한 날은, 어쩌면 우리가 자는 사이에 아빠와 다퉜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서서히 지워져 가는 자신이 슬퍼서였을 수도 있을 거라고. 


어쩌면 남편과 똑 닮은 고집쟁이 딸 때문에 힘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엄마 혼자서 삼켰던 감정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을 것이다. 


엄마는 그럴 때 걸었다고 했다. 하염없이 걸으면서 혼잣말했다고 했다. 나는 아마 걷는 대신 의자에 앉아서, 혼잣말하는 대신 이렇게 글을 적고 있는 것 같다. 


아이가 내 몸속에서 나와 탯줄을 끊는 순간, 아이는 아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해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아이와 엄마는 탯줄로 연결되었던 사이라 알 수 없는 강력한 관계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쩌면 여성을 모성으로 옭아매는 신화일지도 모른다. 엄마도 아이가 힘들 수 있고 때로는 미울 수도 있다는 것을, 친정엄마의 사정을 이해하며 깨달았다. 그런 감정을 잘 해소하는 방법은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하나의 개체로 존재하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며 공생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어느 날 엄마는 싫고 할머니는 좋다는 친구에게 물었다. 

“할머니가 왜 좋아?”

“할머니가 나랑 같이 놀아주거나 엄청 신경 써주고 그런 건 아닌데, 할머니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줘. 그리고 따뜻해. 보살핌 받는 기분이야.”

“할머니와의 기억 중에 좋은 거 있어?”

“할머니 연속극 볼 때 뒤에 누워있던 거. 할머니가 맛있는 거 해주던 거. 연속극 보다가 막 누구 뺨 때리는 장면같이 좀 센 장면이 나오면 내가 ‘저 사람 왜 그래?’하고 물었거든? 그러면 할머니는 또 구구절절 그 연속극 내용을 다 설명해 줬어.”


할머니가 너무 좋아서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전화한다는 친구에게서 할머니의 육아 비법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굳이 뭘 하지 않으셨다. 다만 본인은 본인대로 존재하되 아이를 아이 취급하지 않고 하나의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해 주셨다. 연속극 보다 하는 질문에 ‘애들은 몰라도 된다’라고 하지 않으셨고, 친구가 쫑알쫑알 쏟아내는 일상 이야기를 잘 듣고 같이 놀라고 분노하고 기뻐해 주셨다. 그 외의 것, 잘 먹고 잘 입고 잘 씻는 것과 같은 자잘한 규칙들에는 조금 너그러우셨던 것 같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나를 괴롭게 하는 첫째 아이 육아에 관한 단서를 얻었다. 마음을 얻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상과 작은 규칙들에 매몰되면 그것을 잊는다.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솔직함과 수용인 것 같다. 내가 첫째 아이 육아를 힘들게 느낀 건 아마도 나를 모조리 지우고 아이를 수용하려고 했거나 아이가 무조건 내 틀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해서인 것 같다. 


아이는 산만하고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는데 오감이 민감한 나는 거기서 기쁨을 찾지 못한다. 한 번은 아이가 이를 다 닦고 젖은 전동 칫솔을 돌려 내게 물을 튀겼다. 아이는 웃자고 한 장난이었는데 나는 거기에 정색하며 악! 소리 질렀다. 무의식 중에 나도 모르게 그랬다. 내가 그런 것에 민감한 인간이라 자연스럽게 나온 반응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당황했다. 웃자고 한 장난에 엄마가 소리를 지르니 이해할 수 없었겠지. 나는 소리 지른 것이 무안해져 화살을 돌리기로 했다. 


“이거 아빠가 가르쳐준 말썽이지!”

“어. 맞아. 아빠가 지난번에 나한테 이렇게 했어.”

“아~ 하여간 느네 아빠는 항상 이런 말썽만 가르쳐주는 거야. 안 되겠네. 아빠 혼내줘야겠네.”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런 장난도 가볍게 넘기지 못하는 나의 예민함이 싫었다. 하지만 나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내가 나의 생김새를 부정하면서까지 아이에게 맞춰줄 필요는 없다. 아이에게도 아이의 생김새를 바꾸고 나의 틀에 맞추라고 할 필요는 없다. 이 사건에서 내가 잘못한 것은 예민한 것이 아니라 욱하는 감정을 참지 못했다는 것이다. 친절하고 따뜻한 엄마가 되기 위해서 내가 참기 어려운 부분까지 참아줄 필요는 없다. 솔직하고 다정하게 내가 참기 어려운 부분을 알려주고 내가 잘할 수 있고 아이도 흡족할 수 있는 방식으로 관계를 쌓으면 될 거라고 믿는다. 


나의 감정에는 틀린 것이 없다. 그것이 엄마의 것이라도 그렇다. 물론 아이의 감정에도 틀린 것은 없다. 그것이 아이의 감정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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