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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아무르 Jun 09. 2024

바람

작업하는 엄마들이 많이들 그렇겠지만, 나는 나만의 작업 공간이 따로 없다. 내가 작업하는 공간은 식탁인데, 그 앞에는 커다란 창이 두 개 있다. 그 너머로는 우리 집 작은 정원과 아파트 단지의 나무들이 보인다. 고맙게도 나무가 꽤 크고 많아서 눈앞에는 나무 말고는 보이는 것이 없다. 지금 내 눈앞에는 초록색, 연두색의 크고 작은 나뭇잎들이 노란 햇빛을 받으며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때로는 세차게 때로는 부드럽게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보고 있노라면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기분이다.


나는 바람이 만드는 여러 형상들을 좋아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도 좋고, 바람이 만드는 흔들리는 그림자도 좋고, 바람에 머리를 마구 흔드는 나뭇잎도 좋다. 바람 덕에 바닥에서 소용돌이를 치는 나뭇잎들도 좋고 하늘을 유영하는 나뭇잎들도 좋다. 바람에 날리는 아이의 가벼운 머리칼도 귀엽다. 그렇지만 나는 궁극적으로는 바람에 흔들리는 것들이 아니라 바람 자체를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깃발 참 멋지네. 어, 너무 단순한데, 너무 멋진 거 같애. 야, 깃발은 참 정말 멋진 발명품이야. 그지?”

“그것 때문에 바람이 보이잖아요. 눈에.”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2012)에는 이런 대화가 나온다.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보며 바람을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 사물 자체를 보지 그것 덕분에 바람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진짜로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을 볼 줄 아는 사람. 그렇게 되면 세상이 정해준 의미 속에서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눈으로 중요한 것을 발견하고 거기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린 왕자>의 비행사는 양을 그려달라는 어린 왕자에게 상자 하나를 그려준다. 어린 왕자는 웬 상자를 그렸냐고 내가 원한 건 양이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드디어 자기가 원하는 양을 가지게 되었다며 기뻐한다. 어린 왕자에게 상자 그림은 눈에 보이는 대로, 세상이 정해준 대로, 단순히 상자가 아니었다. 어린 왕자는 거기에 자신만의 의미 있는 시선을 보낸다. 


나의 아이들은 남들과 외모가 조금 다른 기형을 가지고 태어났다. 보통은 큰일 없는 일상이라 생각도 안 하고 살지만 이따금 사춘기가 된 아이들을 상상할 때 쓸데없는 걱정을 할 때가 있다. 나나 나의 님이 그런 것처럼 또래들에게 놀림을 받으면 어쩌지. 그래서 상처받으면 어쩌지. 혹시 나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의 부모님에게 반대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쩌지. 


그러다가도 다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건, 창밖으로 보이는 바람 덕분이다. 나의 아이들은 깃발이 아닌 바람을 볼 줄 아는 사람들로 자랄 것이다. 



얘들아,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그랬대. 

« On ne voit bien qu’avec le cœur. L’essentiel est invisible pour les yeux. »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볼 수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법이야.”


잘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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