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일출봉-광치기 해변-온평포구
새벽 6시 15분. 알람 소리에 눈을 뜨니 세상은 여전히 캄캄하고 고요하기만 하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 일출을 보기 위해 성산일출봉으로 향했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숙소 주변과는 달리 성산일출봉 주변은 차들로, 인파로 분주하다. 흐릿한 계단 조명에 의지하고, 앞서가는 사람의 목소리에 의지해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정상에 올라가 해가 뜨기를 기다린 지 30분 정도 지났을까. 날이 밝았는데도 해는 뜨지 않는다. 새해에도 제주에서 해 뜨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해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비록 일출을 보지는 못했지만, 창백한 낯빛을 한 성산일출봉도 그만의 매력이 있다. 푸르스름한 것이 어딘가 모르게 신비로움을 더한다.
내려오는 길에 우연히 뒤에서 내려오는 여행객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다. 얘기인즉슨, 모처럼 새벽같이 일어나서 올라왔는데 구름이 해를 가려 허탕을 치게 됐다고. 결국 일행 중 이곳에 오지 않고 더 잔 사람이 승리자라는 것이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사람 마음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에 놀러 오는 사람이라면 일출과는 상관없이 한 번쯤은 성산일출봉을 오른다. 그 자체로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출을 보겠다는 목표가 생기는 순간 성산일출봉 자체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하고 해에만 집착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여행객들의 얘기를 듣다가 생각의 초점을 나 자신에게로 옮겨온다.
나 역시 일상생활에서 목표에만 집착한 나머지 주변 사람을,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있는 그대로 사물을 바라보기보다는 그것을 통제하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이내 그 여행객과 나의 모습이 묘하게 교차되었다.
숙소 근처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원래 2코스는 광치기 해변에서 시작되지만, 일출을 보기 위해 성산일출봉 근처에서 하루를 묵었다. 이것저것 볼거리가 많았던 1코스와 달리 2코스는 등산에 가까운 힘든 길이 초반에 나왔다가 심심한 길, 평탄한 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특히 대수산봉을 오를 때면 원래 올레길이 이렇게 힘든 코스였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래도 정상에 오르니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저 멀리 성산일출봉부터 내가 걸어온 길도 보이고, 앞으로 갈 길도 보인다. 올레길의 묘미는 걸어온 길을 곱씹고 걸어갈 길을 조망하는 데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해본다.
올라왔던 오름의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약간은 황량해 보이는 비포장 길들이 이어진다. 그리고 지루한 길이 나왔다가, 다시 또 다른 오름으로 이어지는 힘든 길, 그리고 평탄한 길 등이 계속 이어진다. 이러한 길을 걷다 보니 우리 삶이 2코스를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살다 보면 인생이 과도하게 힘들다고 느껴지는 시기가 있다. 삶이 따분하고 무료하게 느껴지는 시기가 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평탄하게 잘 흘러가는 것 같은 시기도 있다. 그 누구의 삶도 평생 시련으로, 혹은 안정과 평화로만 점철되지는 않을 것이다.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든 나날도 견디다 보면 지나간다. 딱 이대로가 좋다, 는 삶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그저 그런 나날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인생에 손꼽히는 즐거운 시기였음을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세상에 직선으로 그릴 수 있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인생은 저마다의 요동치는 굴곡이 있다. 내 인생에서 나는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그 길이 힘든 길이든 평탄한 길이든 너무 상심하지도 너무 들뜨지도 말자고 다짐해본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겸손해지게 되는, 마음을 다시 잡게 되는 이유이다.
* 올레 2코스 Tip:
- 올레 3B코스를 걸을 예정이라면 2코스와 함께 하루에 두 코스를 걷는 것으로 계획을 잡고 3코스가 끝나기 전에 여정을 마치는 것도 좋아요.
- 중간 스탬프 찍는 지점인 제주 동마트가 코스 초반에 나오는데 이를 중간 지점이라고 착각하면 나중에 심적으로 지칠 수가 있어요.
- 9~10시경에 출발하면 혼인지를 지나 점심때쯤 <보람 식당>에 도착하는 데 여기서 백반을 먹는 것을 추천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