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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 Apr 13. 2023

당근 하러 나갔다가...(4)

언니언니언니

파주시에 들어서며 나는 대부분의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인도는 분명히 있을 것이고 가로등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보는 잘 정돈되어 헷갈리지 않게 찾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한시름 놓았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나는 그동안 걸어왔던 길들을 곱씹어 보았다. 불광역에서부터 파주까지 99%가 평지였고 대부분의 길이 인도가 잘되어 있었으며 가로등도 잘 정비가 되어있었다. 한 50m 정도 가로등이 없던 구간이 있었는데 그 구간을 귀신아 나살려라 하며 후다닥 뛴 것 외에는 모든 구간이 지도상에 그려진 일직선만큼이나 잘 되어있었다.



'아... 언니와 나의 사이에는 이렇게 촘촘히 불 밝힌 길로 이어져 있었구나. 마치 비단길이나 오작교 같네'.


지도위에 길게 늘어선 경로를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이 생각을 한 이유는 불과 2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언니와 연락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기간은 1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에 쌓인 모든 감정을 담아 언니와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 기간이 몇 달이 넘어가자 가끔 언니는 내가 걱정되어 불시에 우리 집을 방문했는데 나는 그때에도 데면데면하게 언니를 맞았다. 차를 타고 집에 가는 언니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언니의 눈물을 보면서도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그러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1년이 넘어갈 때쯤 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속에서 언니를 보았다. 나는 '언니언니'하며 큰 울음을 터트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혼자 누워있던 썰렁한 침대 위에서 나는 꺼이꺼이 울었다. 그 순간 내가 크게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니에게 쌓인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면 나는 밤을 새워서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날 그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받은 더 큰 사랑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언니가 내게 웃어 주었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모습에 기분 좋았던 수많은 순간들과 행복했던 기억들도 떠올랐다. 그렇게 오랫동안 해묵었던 감정의 종식을 침대 위에서 펑펑 울면서 끝내었다.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10대와 20대의 자매로 돌아갔다. 언니는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고 나도 언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언니는 다시 돌아온 동생을 지극히 살폈다. 나도 언니의 육아전쟁을 열심을 다해 도왔다. 우리는 어쩌면 필연적으로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지구상 유일한 존재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언니가 내게 말했다.


'우리는 어쩌면 전생에 연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파주시에 들어서며 도시가 신시가지로 바뀌었다. 지도를 검색해 보니 남은 거리는 1시간 30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언니집은 홈플러스 근처였기 때문에 내가 서 있던 위치의  대각선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지도상으로는 호로록 갈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어째서 1시간 30분이나 걸리는지 믿을 수 없었다. 이미 쉬지 않고 5시간을 걸었고 게다가 춥기까지 했기 때문에 아픈 다리로 1시간 30분을 가는 게 처음처럼 쉽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피로감이 쌓여서 인지 잠도 오는 것 같았다. 지도상의 위치를 기억하려고 해도 자꾸만 잊어버려서 핸드폰을 켜는 횟수가 이전보다 잦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핸드폰의 배터리가 10% 이하를 찍었다. 그것은 이제 순식간에 핸드폰 배터리가 나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집중해서 대각선을 향해 걸어갔다. 한빛마을을 지나 운정건강공원교차로에 들어서자 배터리는 완전히 나가버렸다. 새벽 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그래도 사람들이 간간히 지나다녀서 다행이었다. 나는 기억에 의존해 일단 갈 수 있는 데까지 가기로 했다. 기억상 지도에서는 어떤 공원을 가로질러가는 지름길을 표시해 줬었지만 아닌 밤중에 그 공원은 정말 암흑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방향과 맞는 큰길을 따라갔다. 그러다 어느 갈림길에서 섰을 때 여기서 길을 잃었다가는 1시간 30분이 2시간이 될 것만 같아 마침 매장에 물건을 버리러 나온 사람을 붙잡고 물어봤다.


"홈플러스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어스름한 새벽에 문 닫은 홈플러스를 찾는 낯선이에게 그 사람은 지름길 대신 큰길을 이용해 가는 길을 친절히 알려주었다. 안개 쌓인 일직선의 인도를 한참을 가야 우회전이 나왔다. 그리고 다시 한참을 직진하니 갈림길이 나왔다. 이러니 1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걸리지. 운정신도시의 크기를 몸소 체감하는 순간들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택시 기사님을 불러 세워 길을 물어봐야 했다. 아주 멀지 않은 곳에 홈플러스가 있다고 하였다. 정말로 얼마가지 않으니 불 꺼진 홈플러스의 고깔모자가 새벽 달빛아래에 희미하게 보였다.


'아 이제 다 왔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내가 알아서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미션이 아직 남아있었는데 아파트 동 출입구를 어떻게 통과하느냐였다. 현관문 비밀번호는 아는데 출입구 비밀번호를 몰랐던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핸드폰을 빌려 언니에게 전화를 했으면 해서 출입구에서 다이렉트로 호출하는 대신 아파트 관리실 창문을 먼저 두드렸다. 아무래도 한밤중에 갑자기 울리는 인터폰보다는 핸드폰 벨소리가 언니에게 좀 덜 무서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새벽녘 인터폰에 비친 동생의 얼굴은 어쩐지 나도 무서울 것 같았다.


'아저씨  ***동 ****호를 방문하려고 하는데요. 지금 핸드폰도 꺼져서 언니에게 전화를 할 수가 없는데 전화를 좀 쓸 수 있을까요?' 나는 아저씨가 쉽게 핸드폰을 빌려주실 줄 알았는데 아저씨는 핸드폰을 빌려주시지 않았다. 관리실에 전화가 없는지 전화를 사용할 수 없다고도 하였다. 내가 발을 동동 구르자 ' ****호 맞으세요? 인터폰으로 전화를 해볼게요 '


'그래 뭐.... 이제는 어쩔 수 없네... 새벽에 인터폰 받는 건 정말.... 쫌.... 그렇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방법이 없으니'


아저씨가 번호를 눌렀고 나는 생각했다. '설마 호수를 잘못 기억해서 이 새벽에 엉뚱한 집으로 인터폰을 건 것은 아니겠지.....' 나는 기억을 되살려 호수가 정확한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조금 지나자 인터폰을 누군가 받았다.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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