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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경 Jul 28. 2021

비밀은 아닌 번호

유하 - 푸른, 비닐 우산을 펴면


  빌딩들 사이에서 오백 원으로

  급히 펼쳐든

  푸른 비닐의 공간

  난 오래 잊고 있었던 은행의 비밀 번호를

  기억해낸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 순간

  난 이 거대한 도시 속에서

  유일하게 빗방울들의 노크 소리를 듣는다

  푸른 비닐을 두드리며 황홀하게

  나의 비밀 번호를 호명하는 물방울의 목소리

  나는 열리기 시작한다

  빗방울의 목소리를 닮은 사람이여

  내게 예금되어진 건

  소낙비를 완벽하게 긋는 박쥐 우산이 아니라

  푸른 비밀의 공간을 가볍게 준비할 수 있는 능력,

  비닐 우산을 펴면

  나는 푸른 비닐처럼 가볍게 비밀스러워진다

  빗방울을 닮은 사람이

  또박또박 부르는 비밀 번호 안에서

  천천히 열리는 꿈에 부풀기 시작한다


유하, 푸른, 비닐 우산을 펴면 (全文)



  분명 제대로 눌렀는데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때가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비밀번호를 잘못 눌러도 문이 열리는 때가

  있다는 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삑삑삑삑,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건전지를 빼도

  열릴 문은 열리고 열리지 않을 문은

  그래도 열릴 때가 있다

  무릎이 하얗게 파랗게 질려가고

  벗겨진 칠과 부러진 손톱이 뒤엉켜

  나뒹구는 문 앞에선

  얇아지는 비밀

  어느 장단에 올라 흐르는지 모를 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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