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쿵쿵, 영화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시작한다. 그 소리는 술에 취해 잠든 마일스를 깨워 결혼을 앞둔 단짝 잭과의 총각 파티 겸 여행으로 보낸다. 둘은 여행에서 각기 다른 걸 기대한다. 마일스는 좋은 와인과 골프를 즐기며 휴식을 취할 생각이고, 잭은 결혼 전 마지막으로(?) 다른 여자들과 한바탕 놀아 보겠다는 생각이다. 여행은 그러나 어느 한쪽을 위해서도 흘러가지 않는다. 둘 모두에게 이 여행은 사이드웨이, 그러니까 샛길을 드나드는 일이 된다.
잭은 처음 만난 여성들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끊임없이 마일스가 미리 세워둔 일정을 벗어난다. 식당에만 가면 웨이트리스에게 눈길을 주는 그는 와인 시음장에서 일하는 스테파니를 유혹하고, 혼자서 잠깐 다녀온 수영장에서도 "핫한 여자"를 봤다며 들뜨고, 나중엔 스테파니에게 결혼 예정이란 게 들통나 코가 부러지도록 맞고도 또 다른 유부녀에게 작업을 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연기를 통해 거짓을 현실로 불러오고, 이내 그걸 진실로 받아들인다. 이제 막 하룻밤을 보낸 스테파니와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말하더니, 나중엔 결혼반지를 잃어버리고서 약혼자 크리스틴 없이는 살 수 없다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는 식이다. 이제는 한물 가버렸지만, 그래서 더 이상 배우로서의 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지만 "내가 유일하게 아는 건 내가 배우라는 거고, 내가 유일하게 가진 건 본능"이란 잭의 말은 그래서 그냥 흘려들을 것은 아니다.
구라이지만 혼을 담았기 때문에 진짜처럼 느껴진다. 혹은 진짜이거나.
그러나 마일스는 현실도 허구로 밀어내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담아내고, 마야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도 애써 외면한다. 아니, 이미 2년 전 이혼한 빅토리아를 완전히 놓지 못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새로운 사랑에 조심스럽다고 해야 할까?
마일스는 이 밖에도 여러 지점에서 잭과 대조된다. 잭은 와인에서 "딸기 향은 좀 있는 것 같기도"라 말하고는 원샷을 때려버리는 사람이다. 그것도 입 안에 씹던 껌을 그대로 두고서. 반면 마일스는 같은 와인에서 시트러스와 딸기, 패션 푸르트, 아스파라거스, 견과류를 섞은 에담 치즈 향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하고, 또 그걸 최상의 상태로 즐기고 싶어 한다. 시음 전 스월링을 잊지 않는 그는 그렇기에 잭에게 미지근한 상태로 와인을 깐다는 둥 핀잔을 준다. "너 지금 껌 씹냐?" 이렇게.
그런데 이런 차이를 단순히 와인에 대한 태도의 차이로만 볼 수는 없다. 마일스와 마야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던 밤, 마야는 마일스에게 "사적인 질문"을 해도 되겠냐고 묻는다. 그건 바로 왜 피노 누아를 좋아하느냐는 물음이었다.
마일스는 이렇게 답한다. "글쎄요. 기르기 어려운 품종이잖아요. (…) 껍질도 얇고, 예민하고, 빨리 익어버리고요. 카르베네는 아무데서나 키울 수 있고, 가만 내버려 둬도 잘 자라잖아요. 근데 피노는 그렇게 강인하지가 않아서 계속해서 돌보고 관심을 기울여야 되죠. 사실 피노는 특정 지역에서만 키울 수 있는 거기도 하고요. 그래서 정말 인내심 있고, 애정 가득한 농부가 아니면 기를 수가 없죠. 그 연약하고 여린 면을 어떻게 받아주겠어요. 피노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그 진가를 진정으로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잠재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바로 그때 세상에서 가장 진하고, 아름답고, 섬세하고, 강렬하고, 그윽한 맛을 내죠." 그에게 와인은 지극히 사적인 것, 사랑이기도 하다.
여행이 끝날 때쯤엔 반드시 샛길에서 나와야 한다. 잭은 곧 결혼할 거란 사실을 스테파니에게 들키면서 여행의 끝에 다다른다. 연기는 끝났고, 맞이할 것은 현실이다. 약혼자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예정된 결혼식을 올리는 것 외에 그가 달리 할 일은 없다.
현실을 맞닥뜨리는 건 마일스도 마찬가지다. 마야에게 잭의 비밀을 털어놓아버린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소설 출판이 성사되지 못했단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니 잭에게 등 떠밀려 얼떨결에 거짓으로 뱉어버린 이 "소설 출판 기념 여행"도 끝이 났다. 소설도 끝났고, 맞이할 것은 현실이다. 이제 마일스는 마야에게 진심을 고백할 수밖에, 그리고 전처가 본인과는 갖지 않았던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진짜도 가짜로 만들던 마일스는 이제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스테파니에게 제대로 처맞는 잭
그리고 이건 그가 1961년 산 슈발 블랑을 마실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딱 마시기 좋은 때에 이른 이 와인을 가만히 묵혀두고만 있었다. 어떤 "특별한 순간"이 다가오길 기다리면서. 하지만 이젠 슈발 블랑의 코르크 마개를 열어지금을 "특별한 순간"으로 만들어 낸다. 그 순간엔 슈발 블랑과 페어링이 잘 되는 음식도 없고, 향을 즐기기 위한 글래스도 없다. 그저 싸구려 패스트푸드와 스티로폼 컵이 있을 뿐.
그에게 "61년 산 슈발 블랑을 따는 그날이 바로 특별한 날"이라고 말해주었던 마야는 피노 누아가 좋다는 마일스에게 이렇게 화답했었다. "전 와인의 삶에 대해, 그 삶의 굴곡에 대해 생각하는 게 좋아요. 포도가 자라던 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해 여름 햇살은 어땠는지 (…) 생각하는 게요. 포도를 가꾸고 수확한 그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요. (…) 와인은 정말로 살아 있잖아요. 계속해서 변하고, 새로워지잖아요. 그 맛이 절정에 이를 때까지요. 마일스가 갖고 있다는 그 61년 산 슈발 블랑처럼. 그리고 나선 천천히 내리막 길을 걷죠. 와인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니까." 그런 그녀에게서 (단짝 친구도 읽어주지 않은) 자신의 소설을 다 읽었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마일스는 이 매력적인 여인을 향해 가는 문을 열어야 함을 깨닫는다. 61년 산 슈발 블랑을 열었던 것처럼.
똑똑똑, 영화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끝난다. 좋은 음식과 좋은 글래스가 없어도 와인을 열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이 영화에서 마일스는 자꾸만 타인이 느닷없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뜻하지 않게 잠에서 깨어난다. 그런 그가 마지막 순간엔 비로소 타인의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잠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