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맨 윗자락에 위치한 학교 운동장은 이미 어두웠다. 용마산이 검은 그림자같이 학교 건물 뒤편에 우두커니 앉아있었고, 아카시아 나무 향기가 밤공기를 타고 운동장 그득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고3인 우리는 우리만의 건물에서 밤 10시가 되면 책가방을 챙겨 들고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밤공기로 머리를 식히며 친구들과 재잘거리다가 각자 학원으로 또 도서관으로 흩어져 자정이 넘어가도록 공부했다. 공부를 했던가? 어쨌든 책상머리 앞에 앉아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은 수능 성적만 잘 나오면 내가 원하는 대학, 내가 원하는 학과를 골라서 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앞길이 탄탄대로처럼 열리는 것만 같이. 그렇지만 성적을 떠나서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고 있는 친구들은 별로 없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대학, 취업이 잘 되는 학과가 목표였을 뿐. 게다가 전심을 다해 공부를 해서 대학이란 곳을 간다고 해도 끝이 아니었다. 취업을 위해 또 전력을 다하고, 취업을 하면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아 기르고. 그맘때 내가 유추할 수 있는 인간의 인생이란 단기적인 목표가 달라질 뿐 결코 끝나지 않는 달리기 경주 같았다.
"언니, 그런데 대학 가면 취업해야 하고, 취업하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애 낳고 키우고... 도대체 언제 쉬어요?"
수능 100일 전부터 매일 아침 학교에 나와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는 선배가 있었다. 아침 자율학습이 8시 30분에 시작하는데 그보다 30분 일찍 모여 함께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매일 연락해주고 챙겨주는 선배를 우리는 많이 의지했다. 몇 살 차이 나지 않는데도 당시에는 커다란 사람 같았고, 내 질문에 정답을 말해줄 수 있는 어른 같기도 했다.
"죽어서. 죽어서 쉬지."
선배는 특유의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흔들림 없이 이야기했다.
당시만 해도 대학에 가는 것은 진리였다. 다 함께 달음박질하는 레이스 위에서 혼자 버티고 선다거나 뒤로 돌아 달리는 일 따위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레이스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모르고 달리고 있었다. 대학이거나 취업이거나, 혹은 집을 사거나 건물을 사는 것 따위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다. 죽음까지 달려야 끝이 나는 것이었는데, 그걸 몰랐다. 안다고 한들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남들처럼 대학에 가서 취업을 했고 결혼을 했다. 다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목표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린 날 '꿈은 이루어진다'던 한일월드컵의 성공적인 폐막을 보고서도 우리는 인생의 허무함을 직감하고 있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더니, 삶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부모가 되었다. 나이 서른이면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을 거라고 믿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다. 이런 내가 작고 사랑스러운 한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엄마가 되었다. 내 아이도 내가 살았던 방식으로 살 수밖에 없는 걸까? 남들이 하라고 하는 대로 살았어도 순탄하지 않았다. 어차피 쉬운 인생이라는 건 없다면 조금 다르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흔들려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