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모임 초심자를 응원하다가 든 생각
‘제가 책임지고 도와드릴께요. 할 수 있어요.’
이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분명히 친절한 말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운동에는 진심이지만 서비스에 서툰 헬스장 관장님이 멸치 신입에게 건넬 말처럼. 사실 이 말은 달리기 클럽에 새로 온 사람에게 내가 자주 건네던 말이었다. 내 딴에는 달리기가 두려운 초심자의 용기를 풀-충전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을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들으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막상 들어보니 오늘까지만 나오고 정중히 도망치고 싶었다. 달리기가 두려운 게 아니라 그룹에 폐를 끼치는 게 더 걱정되는 사람의 마음을 처음 느꼈다.
가끔 이렇게 남을 통해서 나를 본다. 예컨대, 내 모습을 타인에게서 본다. 거울을 볼 때는 몰랐는데, 피부가 푸석푸석해서 아쉬운 상대를 보고 반성하는 거다. 아. 그동안 내 피부에게 실례했구나! 선크림 바르는 걸 너무 자주 까먹었구나! 내 모습이 아니라 내 행동을 타인이 고대로 보여줄 때도 있다. 더운 날씨에 상해 버린 개떡같은 질문을 던지고 지루하게 답하는 글을 읽으며 깨닫는 거다. 제기랄 이 쉰내 나는 글. 완전 내가 쓰는 글 같은데. 그렇다면 지금껏 내 글에 반응해 준 사람들은 친절했거나 아니면 짤방만 보고 글을 읽지는 않았구먼. 내게는 이렇게 타인을 보면서 오히려 나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더 알게 된 순간이 적지 않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내가 객관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그걸 아는 하나의 방법은 타인이 나에 대해 말하는 바를 충분히 듣는 것일 텐데, 내 주위 사람은 내게 친절하면서도 동시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나는 그런 인풋을 충분히 들어본 적이 없다. 흔히들 그 대안으로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귀 기울이라 권한다. 내 주위에는 명상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심지어는 묵언수행을 떠나고 돌아온 후에 자신을 더 알게 되었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방법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편이다. 그렇게 찾은 내 모습은 평소의 내 모습이라기보다는, 내가 누군지 찾으려 발버둥 치는 순간의 모습이 아닐까. 마치 국어 시간에 읽던 시에서 온갖 의미를 뽑아냈듯이.
그래서 나는 별생각 없이 타인을 보다가 ‘어, 저거 내 모습 아닌가?’라고 느끼는 순간에야말로 그나마 객관적인 나 자신을 만나는 것 같다. 대체로 그런 순간에는 남에게 받은 평가에 에고가 날 서 있지 않다. 휴가를 내고 낯선 여행지를 돌아다니며 드디어 자신을 돌보는 것 같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가족이나 친구에게서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아 자존감이 기세등등한 상태도 아니다. 타인에게서 나를 보는 경험은 오히려 무방비 상태의 내 자아를 만나는 체험이다. 목욕탕에 갔는데 나체인 채로 예상치 못한 지인을 만나는 일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에, 목욕도 끝마치지 않은 채 서둘러 자리를 떠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렇게 깨닫는 내 객관적인 모습은 나의 흠결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것이 가끔은 현재의 내 모습이 아니라 과거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면 나는 비로소 내가 단순히 늙기만 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깨끗이 세신을 한 사람처럼 그동안 내 부족한 부분을 약간이나마 더 갈고닦았다고 느낀다. 내가 객관적으로 개미 발톱 만큼은 더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면 나 자신에게도, 과거의 내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 사람에게도 조금이나마 더 넉넉한 마음이 생긴다.
그런 순간의 예시를 생각하다가 작년 이맘때쯤 어떤 졸업반 여학생이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인스타 스토리를 보면 여자친구 없는 사람 같아요.’ 당시 나는 달리면서 헐떡거리는 내 모습과 꽃, 바다, 책 사진 따위를 심심찮게 찍어 올리던 중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내 인스타 스토리와 그 말의 인과관계를 이해했다. 나와 비슷한 감성의 스토리를 올리는 지인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솔로였다. 그리고 그의 인스타에서는 진한 솔로 향기가 났다. 친절한 그 학생은 내게 완곡하게 말해준 거였다. ‘솔로탈출 하려면 그런 쉰내 나는 아재 콘텐츠 좀 제발 그만둬요.’ 놀랍게도 그런 콘텐츠를 양산했던 나는 솔로 탈출에 성공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솔로이자 아재스타그램 외길을 걷는 지인에게 상냥하게 말해주고 싶다. 아재스타그램 콘텐츠 생산 라인에서 얼른 도망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