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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주아 Oct 02. 2016

에필로그

시간을 잊어도 좋을 만큼

 



한 달간의 긴 여행이 끝났습니다. 오랜만에 들어선 집안은 익숙한 풍경과 낯선 공기가 뒤섞여 묘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늘 바라보던 창밖도 갑자기 바뀐 계절처럼 당황스럽게 낯설더군요. 이게 내 집이었지,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밥을 차려 먹는 것이 한 달 만입니다. 한 달 전에 냉동실에 넣어둔 공깃밥을 꺼내, 먹어도 될지 고민을 했습니다. 해동을 한 뒤 김치볶음밥을 만듭니다. 배탈이 나지 않은 걸 보면 먹어도 이상이 없나 봅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자동으로 움직이던 손이 도마의 자리를 잊었는지 잠시 헤맸습니다. 더 이상 내일의 여행 일정이 없다는 것에 마음도 적응을 못합니다.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갔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에 무언가 허전함이 찾아온 것입니다. 짧은 여행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입니다. 


다음날 아침 10시쯤, 인천공항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짐 가방이 아직 런던에서 출발을 안 했다고 하는데요, 내용물과 가방 색깔, 상표 같은 것 좀 더 자세히 말해주시겠어요?" 

수화기 너머로 항공사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래요? 영영 잃어버려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나요?"

"아니오, 그런 경우는 거의 없어요.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경우는 주로 이름이 잘못 적혔거나, 수화물표가 아예 없거나 하는 문제가 있을 때예요." 

직원의 말에 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저의 캐리어는 아직 여행 중이었습니다. 혼자서 남의 손에 이끌려서 말이죠. 돌아오는 날을 떠올리니 지금은 웃음만 나네요. 그날의 여정은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런던에서 환승해서 한국으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아침, 런던에 지독한 안개가 찾아왔습니다. 런던의 기상 상태를 보며 대기하느라 피우미치노 공항에서는 비행기가 한참 동안 뜨지 못하고 말았죠.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환승 대기 시간이 3시간이었는데 그마저도 넘어서 버렸습니다.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니 리부킹(Rebooking)을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항공사 데스크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리부킹 구역에는 그 시간대의 비행기를 놓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있었습니다. 통로까지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이 바로 리부킹 줄이라고 하더군요. 마치 무슨 재난 현장 뒷수습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사태를 파악하려는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과 웅성거림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저는 작은 크로스백 하나만 달랑 맨 채 줄의 맨 끝에 섰습니다. 그렇게 서서 다섯 시간 동안 발이 묶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이죠. 



그때부터 그냥 멍하니 화장실도 못 가고, 앉지도 못한 채 서 있게 되었습니다. 히드로 공항 리부킹 창구의 직원들은 세월아 네월아 일을 했습니다. 그걸 지켜보며 속이 터지긴 했지만, 줄이 줄어들고 차례가 가까워지면서 모두 서로 쳐다보며 기뻐하는 동지애가 살짝 생기기도 했습니다. 


처음 보는 리부킹 사태가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항공사 직원은 차례가 되면 목적지로 향하는 가장 빠른 비행 스케줄을 확인하고 발권을 해주었습니다. 당일 내로 비행기가 없으면 호텔 숙박을 제공했죠. 간단한 세면도구 파우치와 함께 꽤 좋은 호텔의 무료 숙박권을 손에 쥐게 된 사람들은 환호를 하며 창구를 떠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조회하느라 이십 분 넘게 부킹을 하지 못하기도 했죠. 다행히 저는 그날 밤 출발하는 항공편을 타게 되었습니다. 두 시간 반 정도 있다가 출발하는 일정이었죠. 

인천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슬리퍼를 신고 있다가 다시 운동화를 신으려고 했더니 발이 들어가질 않았습니다. 터질 듯한 운동화를 이끌고 집에 와서 상태를 보니 어마어마한 코끼리 발이 되어 있더군요. 



여행을 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먹고사는 일은 어디나 다 비슷하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꿈의 장소라고 생각했던 곳에서도 사람들은 직장에 다니고 장사를 했습니다. 다만, 도시와 생활 속에 예술이 조금 더 배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12개의 도시들을 여행하며 본 사람들은 정말 다양했지만, 그냥 태어나고 자란 각자의 모양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는 어떤 완벽한 표준이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꼭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비교라는 것이 무의미했습니다. 아마도 같은 상황, 같은 조건에 놓일 때 비교라는 것이 시작되나 봅니다. 저는 좀 달라질 것 같았습니다. '생긴 대로 살고, 자연스럽게 나의 방향을 느끼며, 내 나름대로의 길에서 행복을 찾아야겠다'라는 것을 이미 피부에 담고 와버렸습니다. 


여행은 여러 가지 상황 속에 나를 둠으로써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관찰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속에서 발견하는 저 자신은 정말 작고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족해도 괜찮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잘난 사람도 많이 보았고, 좀 못난 사람도 많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부족한 모습으로도 자신과 자신의 하루를 소중하게 대하는 태도를 보일 때였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조건과 환경을 판단하기보다는 그러한 나의 인생을 내가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시간을 잊어도 좋을 만큼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에 많이도 벅찼습니다. 모든 것이 가슴속에 별이 되어 박혀 있습니다. 언젠가 그 안쪽이 어두워지거든 조금 더 빛을 내어주었으면, 하고 기대는 마음도 있습니다. 고생도 했고 힘든 것도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여행을 뒤돌아볼 때면 좋았던 것 위주로 회상을 하게 됩니다. 인생에서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그렇게 저는 여행에서 사는 법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아해 주시고, 응원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모든 라이킷과 댓글 그리고 공유의 손끝에 담겼을 마음이 
저에게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브런치 앱 메인에 선정되고 가파른 조회수와 라이킷의 세례를 받으며
꺄악, 하고 지인들과 함께 환호성을 질렀던 순간이 떠오르네요. 
여러분의 클릭과 모든 흔적이 제 일상의 오아시스였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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