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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주아 Jan 02. 2017

여행자와 이방인 사이

서운함을 느끼는 대신 균형을 배우다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내 마음은 오직
나만의 책임이었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국립 미술관에 가기 위해 다시 버스를 타고 칼 12세 광장으로 향했다. 국립미술관은 멜라렌 호숫가에 위치해 있어서 들뜬 마음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당황스럽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내부 수리 중이라는 내용과 임시 전시장 위치가 입구에 붙어 있을 뿐이었다. 여긴 또 어딘지, 구글맵에 주소를 입력해보니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참고로, 국립미술관은 2년이 지난 지금도 리모델링 중이다. 2017년 개관 예정이라고. 그들의 '임시(temporary)'가 이렇게 길 줄 몰랐다.


임시 전시장은 스웨덴 예술 아카데미 건물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여기저기 서 있는 조각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시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보관 중인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내 발소리만 울리는 고요한 전시장. 난감한 분위기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일단 둘러보기로 한다.  

회화는 본 적이 많았지만 제대로 된 조각은 처음 보는 순간이었다. '모세(Moses)'라는 제목의 조각상 앞에 '미켈란젤로(Michelangelo)'라고 메모가 붙어 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인가?'

'귀한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이렇게 막 놓여 있을 리가 있나?'

'여기 학생들의 작품인가?'

'저기 헤드폰 표시가 있는 걸 보면 전시품이란 뜻일 텐데...'

'이렇게 때가 많이 묻었는데 진품이겠지'

'그렇다고 하기엔 관리가 너무 소홀하지 않나, 누가 깨트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혼자서 주거니 받거니 덤 앤 더머, 1인 2역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진실은 끝끝내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마치 누군가의 저택에 몰래 들어온 사람처럼 약간은 신비롭고 약간은 불안한 마음으로 감상을 이어갔다. 모세 조각상은 한참 우러러봐야 할 만큼 거대했다. 흘러내릴 듯한 옷자락과 차가운 근육, 생생한 표정과 섬세한 눈빛이 살아있는 듯 보였다. 내가 가고 나면 잠시 기지개를 켰다가 다시 자세를 잡을 것만 같았다. 조각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나중에 파리나 로마에서 수없이 많은 조각들을 보게 되었지만,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오직 모세상과 나만의 비밀스러운 첫 만남이 있었던 이 날 보다 특별한 순간은 없었다.



스웨덴 국립 미술관이니만큼 생소한 스웨덴 화가들의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눈에 익은 작품은 있었으니 바로 스웨덴의 국민화가 칼 라르손(Carl Larsson, 1853~1919)의 그림들이었다. 온화한 빛과 아늑한 분위기가 가득한 그의 그림은 볼 때마다 마음까지 평화롭게 해주었었는데 오늘 같은 날 전시장에서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라르손은 스웨덴 빈민촌 출신이었다. 어릴 때부터 화가의 꿈을 키우며 학업과 일을 병행한 라르손은 20대에 들어 마침내 파리로 떠나게 된다. 파리에서 예술가로서 성공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했지만 파리 살롱에는 속하지 못하고 그렇게 그는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지금의 칼 라르손은 이런 운명에 의해 탄생된다. 칼 라르손 하면 떠오르는 따뜻하고 목가적인 수채화는 이후 그가 가족과 함께 살았던 스웨덴 중부 지방의 순드본(Sundborn)의 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파리에서 성공했더라면 이러한 그림들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름답고 포근한 전원생활의 풍경,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와 소품, 평화로운 가족의 모습이 너무나도 이상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이 작품들은 라르손이 행복한 가족생활에 대해 가졌던 비전을 상상하여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만 보면 그렇게도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졌던 모양이다. 결핍은 상상을 낳았고, 상상은 예술을 낳은 셈이다.

Carl Larsson - Getting Ready for a Game, 1901


붉은 벽 중앙에 돋보이는 한 남자의 얼굴. 그는 램브란트다. 램브란트의 자화상을 제시하며 요즘 시대 셀카와 서양 미술사에서 발견되는 자화상 사이에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기획전이다. 셀카(selfie)라는 것이 현대인의 삶에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화두. 셀카는 거울 속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던 서양 미술의 전통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자화상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소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인간의 필요를 표현한 최초이자 최고의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혹자는 화가가 단지 모델을 구할 돈이 없었기 때문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램브란트는 부유한 적도 있고 궁핍한 적도 있었으므로 반쯤은 맞는 이야기이다. 고흐의 경우라면 -가슴 아프게도- 100%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유야 어쨌거나 많은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렸다. 하지만 램브란트는 특히 자화상을 많이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저 단순하게 거울 속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두 개의 거울을 사용하여 자신의 다양한 표정을 포착하려는 노력까지 했다. (셀카를 찍기 위해 핸드폰 전면 카메라를 향해 다양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요즘 풍경이 떠오른다.) 당시의 비평가들은 이런 그의 행동을 쓸데없다고 말했으나, 시간이 지난 후 사람들은 이것을 자아에 대한 탐구였다고 평가했다. 이 전시도 그 연장선에 있는 듯하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남몰래 셀카를 찍을 때면 화면 속 낯선 표정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내 표정을 가장 모르는 사람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셀카를 찍고 싶은 욕구 속에는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더 심오한 본능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국립미술관 현수막과 브로셔 등의 모델로 활약한 Alexander Roslin의 작품 The Lady with the Veil, 1768   




스톡홀름의 저녁. 어김없이 바람은 차갑다. 텅 빈 도로 위로 자전거를 탄 한 무리의 젊은 남자들이 멈춰 선다. 신호가 바뀌자 질주하며 사라지는 사람들. 다시 나는 혼자가 되었다.

길거리에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도시를 홀로 여행하는 기분은 묘하다. 누군가 반갑게 맞이해주는 이가 없으니 돌연 여행자가 아니라 이방인이 된 듯하다. 그 누구도 날 밀어낸 적은 없다. 다만 어딘가 -그저 지나가는 타인의 숨소리에라도- 의지하던 습관을 둘 곳이 없을 뿐이다. 헛헛한 공간에서라도 괜찮을 수 있어야 하는 그런 순간이다, 지금은.

휑한 거리의 바람은 마음속까지 쓸어갈 것 같았다.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내 마음은 오직 나만의 책임이었다.

자전거를 가르쳐 주느라 뒤에서 잡아주던 누군가가 이제는 손을 놓아 버린 듯한 허전함. 그리고 잠시 동안의 비틀거림...... 그래도 감사했다. 불안한 나를 붙잡아 주었던 수많은 인연들이 있었음을 그들의 부재 속에서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앞으론 정말 혼자 가야 할 것 같다고,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오히려 누군가의 뒤를 붙잡아주어야 할 때라고, 그날 저녁 스톡홀름의 바람이 세차게도 일깨워주었다.   


어제 실패한 저녁식사 경험을 만회하기 위해 오늘은 꽤 유명하다는 레스토랑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스웨덴 하면 미트볼이니 메뉴는 정해졌다.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리 넓지 않은 아늑한 실내가 나타났다. 디귿자 모양의 바가 중앙을 차지하고 있고, 창가와 벽을 따라 2~4인용 테이블이 놓여 있다. 몇 개 안 되는 테이블엔 이미 손님이 다 차서 할 수 없이 텅 빈 바에 혼자 앉게 되었다. 하얀 셔츠에 까만 조끼를 입은 깔끔한 복장의 웨이터는 멋쩍게 건넨 나의 미소를 외면한 채 주문에만 관심을 보였다. '나는 절대 웃지 않을 거야'라는 눈빛에 내 심장은 더 소심해져 버렸다. 음식을 기다리며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려 노력은 했지만, 사실은 꽤나 어색하고 무안했다. 다른 이를 탓할 일은 없었다. 괜히 그런 것이었다. 나만 그들과 다른 동양인이라서, 나만 그들과 다른 여행자라서, 나만 그들과 다른 혼자라서. 갖가지 핑계를 대며 오히려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고 있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텅 비어 있던 나의 좌우로 스웨덴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사람들 속에 묻히니 그나마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혹 어디서 왔냐는 호기심 어린 질문을 던진다면 얼마든지 대화에 응할 생각이었지만 그들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말을 걸어오지도 않은 채, 절대 튀지 않는 목소리로 자신들끼리의 대화에만 열중했다. 스웨덴어로 나눈 그들의 대화 속에 내가 등장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그렇게 철저히 고독하게 혹은 자유롭게 앉아 있었다.

기대했던 미트볼이 나왔다. 하지만.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비주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역시 실패다. 마치 약속 시간에 늦게 와서 식은 음식을 먹는 듯한 기분이었다. 간도 여전히 매우 짰으며 맛도 그저 그랬다. 맛있게 먹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용기를 내어 직원에게 말을 걸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미트볼의 온도만큼이나 미적지근했다. 순간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는 떡갈비가 아른거렸다. 식당 아주머니의 따듯하고 정감 어린 말들도 함께.


저녁도 먹었고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다리도 아프고 목도 따갑다. 일 년 중 한번 감기에 걸릴까 말까 하고 두통이나 소화불량은 거의 모르고 사는 사람이라 아플 수 있단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당연히 아무런 약도 챙겨 오지 않았다. 결국 올해 감기는 스톡홀름에서 치르는 중이다. 그것도 한여름에.

약국을 들렀어야 하는데 집으로, 그러니까 호텔로 가는 버스를 타버렸다. 이제는 버스 타는 것도 편안하고 익숙하다. 좋아하는 곳에서 익숙해지는 기분은 좋다. 나도 조금 이곳의 일부가 된 것 같아서 좋다.  

평일 저녁이라 길은 제법 밀리기도 하지만 버스 안에서까지 밀칠만한 인파는 없다. 숙소에 도착하기 몇 정거장 전 마침 창 밖으로 아포텍(APOTEK)이 보여 얼른 내렸다.


오후에 두 번째 호텔에 체크인을 했을 때였다. 프런트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여자에게 다가가 근처에 약국이 있냐고 물었다. "호텔에서는 좀 떨어진 곳에 있지만 어디에서든 아포텍이란 간판을 많이 볼 수 있을 거예요. 거기 가시면 돼요." 시원시원한 말투의 그녀는 친절한 대답과 함께 메모지에 스펠링까지 써서 건네주었다. 


아포텍은 약국과 편의점이 함께 있는 드러그스토어(Drugstore) 체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는 진열대가 가득하다. 꽤 넓은 규모에 환한 불빛, 깨끗한 실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약국은 왼쪽, 편의점은 오른쪽이다.

왼편으로 다가가자 하얀 가운을 입은 아랍계 여성 약사가 따뜻한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그녀의 눈빛이 벌써 반쯤 아픈 것을 치료하는 듯하다. 목이 따갑고 아프다, 편도선이 부었다는 증상을 대략 설명하니 두 가지 약을 추천해 준다. 영어 표기도 없고 스웨덴어로만 적혀있으니 약사를 믿는 수밖에 없다. 약도 약이지만 목이 따갑다는 나의 호소에 공감하며 지어주던 그녀의 표정. 그 마음으로부터 받은 위로는 약보다 고마웠다. 같은 이방인이라 그런가, 유독 아랍계 사람들만이 익숙한 미소와 친절을 보인다. 간만의 친절에 괜한 서러움이 올라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무안하리만치 독립적인 스웨덴인들의 태도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난 뭘 바랬던 거지?’

그들이 나에게 꼭 친절해야 할 이유는 없다. 타인의 친절을 습관처럼 바라왔던 건 아닐까. 나도 모르게 그런 당연한 기대를 품고 있었음이 문득 머쓱해진다. 스톡홀름엔 괜한 친절도, 괜한 불친절도 없다. 으스대는 것과 비굴한 것 사이에서 정확히 중심을 잡고 서 있는 듯한 스웨덴 사람들. 나는 그들로부터 서운함을 느끼는 대신 균형을 배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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