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문화의 스테레오 타입을 들여다보기
내가 스페인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 스페인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추천한 영화가 있다. 바로 Juan Antonio Bayona 감독의 <The Impossible>를 이어 두번째로 흥행한 Emilio Martinez Lazaro 감독의 <Ocho Apellidos Vascos(이하 ‘여덟가지 성씨’로 줄임‘>다.
처음 어학연수를 가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스페인 친구들과 이 영화를 봤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이 영화를 안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고, 그 친구들 중에는 이 영화를 이미 세번이나 본 친구도 있었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영화의 문맥을 거의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스페인의 빠른 말투를 못 알아들은 탓도 있지만,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쓰이는 다소 영어스러운 발음이나 바스크지방에서만 통용되는 단어의 뜻을 알아차리기란 스페인 표준어인 가스떼야노를 배운 나에게는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심각했던 건 스페인 문화에서 비롯된 특유의 웃음코드를 읽어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스페인 친구들은 또 보는 영화가 뭐 그렇게나 재밌던지 상영 내내 크게 웃으며 감탄사를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문화의 스테레오 타입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에 대해 쓰라는 어느 전공수업의 과제로 이 영화를 택했다. 사실 1년이 지나고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나는 깨달았다. 스페인 영화의 주요 코드는 막장과 실소 약간의 저질스러움 가운데 이 <여덟가지 성씨>는 자신의 특수한 영화 문맥을 아주 잘 지켰다는 걸 말이다. 물론 이 영화 역시 극단적인 스테레오 타입을 바탕으로 캐릭터 설정을 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외국인들은 이 영화 하나만으로도 스페인 내에 녹아있는 국민들의 의식과 문화 갈등 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니 나에겐 굉장히 흥미로웠을 뿐이다.
영화의 이야기 ¿Como es la pelicula?
안달루시아 세비야. 한 로컬 레스토랑에서 축제가 열리고 웨이터 라파는 지역의상을 차려입고 무대에 나가 반(反)바스크 농담을 한다. 같은 축제에 있었던 아마야는 스크 출신으로, 세비야 전통의상인 플라멩고 의상을 입은 자신 스스로가 못 마땅하다. 그녀는 술을 진탕 마시고는 자신의 지역을 욕하는 라파의 농담에 발끈해 화를 낸다. 라파는 소란을 막으러 무대에서 내려와서는 아마야를 내쫓고 우연히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 그의 집에서 함께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날 먼저 일어난 라파는 아마야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라파가 그녀에게 아침을 차려주러 부엌에 간 사이, 아마야는 잠에서 깨 인사도 없이 고향 바스크로 돌아간다. 라파는 아마야가 실수로 놓고 간 가방을 가지고 그녀를 만나러 북쪽 바스크로 향한다.
이 영화에는 바스크 지방이 주로 등장한다. 아마야는 파혼을 당한 상태였고 열렬한 바스크 민족주의자인 어부, 그녀의 아버지가 이 소식을 모른 채로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바스크로 돌아온다. 그녀는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라파에게 결혼식이 열리기로 되어있는 3일 후까지만 자신의 남자친구인 척 해달라고 부탁한다. 아마야의 마음을 얻기 위해 라파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지만, 민족주의자인 그녀의 아빠에게 바스크 출신처럼 보이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쓰는 언어부터 옷차림, 문화까지 모두 다른 상태. 여러 번의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버스에서 만난 안달루시아 출신이지만 바스크에 거주중인 아주머니는 그를 돕고 심지어 엄마인 척을 한다. 결론은 그녀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라파가 바스크사람이 아닌 걸 의심하지만 결국은 그를 믿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혼식 당일, 아마야를 신부로 받아들이겠냐는 신부님의 질문에 라파는 자신은 세비야 출신이라고 말하고는 도망가지만, 결국 며칠 후 아마야가 라파를 찾으러 세비야로 내려오면서 다시금 둘은 사랑에 빠진다.
참고로 영화의 제목인 ‘여덟 가지 성씨’는 아마야의 아빠가 하도 라파를 수상하게 여긴 나머지 라파에게 “네가 바스크 사람이라면 바스크의 대표적인 여덟 가지 성씨를 대봐라”고 한 데에서 나왔다. 대표적으로 이질적인 문화와 구분 짓는 그만의 방법이었던 셈이다.
스테레오 분석1. 스페인의 지역 갈등
영화에서 라파는 바스크 출신인 척해서 사귀게 된 친구의 권유로 바스크 지방 분리 독립 시위에 나간다. 얼떨결에 메가폰을 잡으면서 라파 스스로 독립 시위를 주도해야하는 상황을 맞닥뜨린 것이다. 처음에 라파는 소심한 목소리로 그를 따르는 바스크 사람들에게 말한다.
Somos Mejores Que Los Españoles(우리들은 스페인사람보다 낫다)
그 뒤를 이어 바스크 깃발을 들고 라파를 따라온 사람들이 일제히 이를 합창한다. 이 시위는 점점 과열되었고, 한 바스크 시민이 뒤에 서있던 스페인 정부 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는 것으로 장면이 끝났다. 자칫하면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이 장면이 극도로 폭력적인 장면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스페인 여러 지방에서 분리 독립 요구는 생각보다 심각하게 제기된다. 현재는 바르셀로나가 포함된 까딸루냐 지방과 바스크 지방이 대표적인 분리 독립 요구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내가 스페인에 있을 때는 안달루시아 지방 역시 분리 독립을 주장하려는 움직임이 준비 중이라는 뉴스도 봤다.
“지난해 5월 13일(한국시간)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발렌시아에서 빌바오와 FC 바르셀로나의 스페인 국왕컵 결승전이 열렸다. 경기 전 스페인 국가가 연주되는 순간 빌바오와 바르셀로나 팬들이 일제히 일어나 그라운드를 뒤로 하고 돌아섰다. 스페인 국가를 듣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시였다.”
위 기사와 같이 까탈루냐와 바스크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본인 스스로를 스페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내가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 스페인어로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그들의 언어인 까딸란이었고 각 지방에서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를 필수로 이수해야하며, 언어시험에 통과해야 교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또한 한 예로 축구팀 바르셀로나 fc가 운영하는 유소년 축구팀은 까딸루냐 출신 어린이들만 입단 시험을 치룰 수 있도록 제한해놓았다. 한편 바르셀로나의 길거리와 집을 까딸루냐 깃발로 장식해놓기도 했다.
사실 이 분리 독립 주장은 뿌리가 깊다. 왕위 계승 전쟁이 한창이었던 1714년, 까딸루냐와 바스크는 펠리페 5세의 침략을 받아 스페인 일부가 되었다. 1936년 공화정이 수립되며 이 지방은 자치권을 되찾긴 했으나 곧이어 들어선 프랑코 독재정권은 이를 모두 무효화했다. 또한 두 지방이 프랑코 독재정부에 반발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언어로 말하거나 출판하는 것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그들에게 스페인 국기는 파시스트의 상징인 것이었다.
아직도 까딸루냐와 바스크를 중심으로 한 분리 독립 요구는 계속되고 있다. 특히 바스크에는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테러집단인 ETA(바스크 분리주의자 Euzkadi Ta Askatasuna)가 있다. 영화에서도 ETA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이는 바스크에 속한 산 세바스티안이라는 도시에서 결성된 급진주의 비밀결사단체로서 무장 투쟁을 통하여 스페인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 테러주의자들은 이란, 레바논 등 이슬람 국가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맥도날드 테러사건을 비롯한 여러 차례의 테러를 주도하기도 했다. 또한 바스크는 스페인 내에서도 배타적인 지방 중 하나로 산세바스티안 축구팀인 ‘레알 소시에다드(Real Sociedad)’가 외국 선수를 영입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며, 빌바오 축구팀인 ‘아틀래틱 빌바오(Atletic Bilbao)’는 아직도 외국선수를 기용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스페인에서는 어디 지역 출신인지가 굉장히 중요하고, 새로 사람을 사귀면 출신지를 꼭 묻는다. 뒤에 다룰 것이지만 각 스페인 지방마다 문화와 사람들의 옷차림, 쓰는 이름까지 너무나 달라서 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사람이 여럿 있으면 어디에서 왔는지 대충 감이 온다.
하여 영화에서 아마야의 아빠는 딸의 남편감이 어디 출신인지가 가장 중요했고, 라파가 바스크에서 자주 쓰이는 이름으로 개명까지 하며 출신지를 철저하게 숨기려고 했다.
스테레오 분석2. 지역마다 다른 옷차림
라파가 처음으로 아마야의 아빠를 만나기로 한 날 그는 남색 카라가 달린 하얀 카라티에 버건디색 바지를 입고 금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왁스를 묻혀 빳빳이 밀어 넘긴 머리에, 수염은 짙게 기른 행색이 딱 안달루시아인 패션이었다. 아마야는 그에게 다가가 금목걸이가 안달루시아의 상징이라도 되냐며 목걸이를 풀었고, 세비야 축구팀 노래가 벨소리로 지정되어 있던 그의 핸드폰을 가져가 전원을 꺼놓았다.
그렇다면 라파가 그녀의 아버지를 만났을 때는 어떻게 변했을까? 그는 파란색과 남색 무늬의 스프라이트 티셔츠에 공사장에서나 입을 법한 조끼를 입고 있었다. 후래한 재킷은 그의 허리춤에 묶여져있었고, 한쪽 귀에만 검은 귀걸이를 찼다. 헝클어진 머리 뒤에는 길게 땋여진 머리 한 가닥이 꼬랑지처럼 내려가도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아마야의 아빠는 약속시간에 늦은 라파를 처음 보고도 바스크어로 인사를 하며 친근하게 음료를 주문해준다. 그의 행색만 보고는 같은 동네 사람일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과연 스페인 각 지방마다 통용되는 옷차림이 있기라도 한걸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옷차림을 보고 한 사람이 전주 출신인지 부산에서 왔는지, 혹은 서울에 사는 사람인지 알아낼 수는 없다. 하지만 스페인은 각 지방마다 특유의 스타일이 있고, 심지어 그 스타일이 명확하기까지 하므로 서로가 서로를 잘 알아차린다.
아직도 기억나는 스페인 지방의 옷차림에 대한 예가 두 가지 있다.
1) 나는 스페인 남부에 위치한 발렌시아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발렌시아도 그들만의 언어인 “발렌시아노(Valenciano)”가 있기 때문에, 어학원에서 일하는 교사의 대다수는 표준어인 까스떼야노를 구사하는 타지방 출신이다. 하여 한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발렌시아 남자는 자기 취향이 아니라며, 안달루시아 남자들이 섹시하고 다정하다고 했다. 나는 선생님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생김새라도 다르냐고 물어보니 그것보다 스타일이 무척 다르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구글에 “발렌시아남자”, “안달루시아 옷차림” 등을 검색해서 나에게 보여줬다. 결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2) 한번은 안달루시아 지방인 그라나다와 말라가에 놀러간 적이 있다. 함께 갔던 스페인 친구 역시 첫 방문이었다. 스페인은 테라스에서 음식을 먹는 문화인지라 밖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친구가 말도 없이 사람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다. 친구에게 음식이 입에 안 맞냐고 물어보니 사람들 옷차림을 구경하고 있다고 했다. 친구의 말을 듣고 안달루시아 사람들(특히 남자)의 옷차림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그 옷차림은 내가 공부하던 발렌시아 사람들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발렌시아는 남쪽 바다마을이고 미국을 예로 들면 캘리포니아처럼 날씨가 매우 맑아서인지 사람들이 밝은 색상의 옷을 선호한다. 약간은 난감할 정도로 샛 노란 색, 형광색, 주황색 바지를 입은 사람을 많이 보았고 대체로 위아래의 조화보다는 밝게 보이기에만 집중한 것 같았다. 반면 안달루시아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남자친구룩”을 하고 있었다. 체크무늬셔츠에 청바지, 셔츠에 카디건 등을 자주 입으며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그들에게 잘 어울리는 수염을 짧게 길렀다. 더 세련되어 보였다.
나는 영화를 보고 그때의 일화들이 떠오르면서 각 지방마다의 스타일을 조사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위의 그림이 그것이다. 대체적으로 세비야는 단정하고 말끔한 스타일의 신사 느낌 옷을 입는다. 처음에 라파와 그의 안달루시아 친구들은 흰 셔츠에 어두운 계열 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었는데 이와 일맥상통한다.
내가 살았던 발렌시아에는 왜인지 민머리로 다니는 남자들이 많았다. 선생님 말에 의하면 그곳은 해가 강하기 때문에 통계적으로도 스페인 내에서 탈모가 진행되는 남성의 비율이 타 지방보다 높다고 한다. 또한 밝은 색 계열의 옷을 많이 입고, 맑은 날씨 덕에 운전을 거칠게 하는 사람이 많으며 늘 수다스럽고 활기차다.
마드리드는 수도라서 일까. 옷차림이 가장 현대화되었다. 거리에서 본 젊은이들은 실험적인 패션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발렌시아 젊은이들이 정말 편하고 소박하게 옷을 입는 느낌이었다면, 그에 반해 마드리드의 젊은이들은 생동적이고 도시적인 패션을 추구하고 있었다.
영화에서 다루는 바스크의 패션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있으니 바로 우리가 아는 그 베레모다. 이 모자는 바스크의 목동들이 쓰던 모자로부터 유래했다고 전해지며 라파의 친구들이 안달루시아 출신임을 감추려고 이 모자를 쓰고 결혼식 하객으로 오기도 했다.
한 나라에서 옷차림으로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니, 그만큼 각 나라 별로 독립성이 뚜렷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스테레오 분석3. 서로가 갖는 지역에 대한 편견
스페인에 존재하는 많은 편견 중 하나는 날씨에서 비롯된다. 처음에 라파가 무대에서 바스크를 험담하는 것을 들은 아마야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뭐가 잘났다고 바스크에 대해 떠드나요? 제일 게으르고 시에스타를 자고 나서도 또 즐길 거리를 찾으면서...
사실 아마야가 안달루시아에 가진 스테레오 타입은 스페인에서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보다 땅이 세배가 더 큰지라 스페인의 남부와 북부의 날씨는 확연하게 다르고 기온 차이도 심하다. 해서 인간의 성격이 형성되는 데에는 날씨도 한몫 하니 아마야가 안달루시아 사람들과 달라 보이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주로 북부인 바스크지방에서 촬영되었는데, 대체로 아마야의 아빠가 배를 댈 때마다 항구 뒤로 보이는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반대로 스페인 남부는 거의 일 년 연중 맑고 건조한 결과 라파는 늘 흥이 넘쳤다.
안달루시아는 여름기온이 40도 넘을 정도로 덥기 때문에 점심식사를 마치고 오후 3~5시까지는 밖에 돌아다닐 수 없다. 3월에 그라나다를 갔을 때도 반바지에 반팔차림을 했지만 등 뒤로는 땀이 흘러내렸다. 해가 너무 뜨거워서인지, 집들은 빛을 반사시키기 위해 하얀색으로 칠갑 질을 했다. 하여 이 시간에 사람들은 외출을 삼가고 주로 집 안에서 1~2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며 낮잠을 잔다. 하지만 스페인 북부 사람들에게는 이런 남부사람들의 문화가 그저 게을러 보이는 것이다. 또한 남부는 플라멩코 문화가 활발한데 아마야가 말했듯이 북부사람들에게 그들은 늘 놀 궁리만 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북부에 대한 편견은 어떨까. 내가 스페인에서 어학연수를 한지 2개월이 되었을 때 어쩌다 보니 스페인 남자친구가 생겼다. 그의 이름은 ‘헤수스(Jesus)’, 라리오하(La Rioja) 출신으로 바스크 지방보다는 아래에 위치해있지만 어쨌든 북쪽인지라 날씨가 흐릴 때가 많고 그리 번화한 곳도 아니다. 당시 나는 남부에서 어학연수 중이었고 헤수스는 그곳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학원에서 가끔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면 스페인 선생님들은 북쪽에서 왔으면 진지하고 재미없지 않냐고 더러 물었다. 북쪽의 추운 날씨에서 비롯된 질문이었다. 또한 그의 고향이 라리오하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와인만 마셨겠다는 농담도 했다. 실제로 라리오하는 와인 공장이 스페인에서 제일 많은 곳으로 스페인 총 와인 생산량의 70%를 담당하고 있다. 남부사람들이 북부사람들에게 갖는 스테레오 타입은 진지하고 조용하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겨울에는 남부 기준으로 매우 춥고 딱히 남부만큼 춤 문화가 발달하지도 않았기에 북부사람들이 대체로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영화의 간접학습과 스테레오 타입의 위험성
사실 영화에 문화적인 요소가 배제되기란 불가능하다. 일단 감독이 어느 한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화면을 연출할 때, 장소를 섭외할 때 그에게 가장 익숙하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영화 속에 문화적인 세계를 심어놓게 된다. 관객 역시 감독이 이끄는 다른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영화를 감상하게 된다.
내가 이 <여덟 가지 성씨>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 영화는 어느 정도 스페인에 대한 문화를 깨우치고 나서 봐야할 영화긴 하지만, 영화를 통해 내가 기존에 알던 스페인 문화에 대한 신념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해서 1년 후 영화를 보았을 때 날씨나 성격과 관련된 스테레오 타입에 심하게 공감했고 내가 아는 스페인 문화를 더 잘 습득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스페인 영화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대부분의 영화에 신부님과 바(bar)가 등장한다. 이 신부님은 영화 속에서 복잡한 사건에 재치 있게 충고를 하는 인물이고, 잘못을 저지른 주인공이 고해성사를 하기 위해 찾는 해결자 역할을 한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서 신부님과 국민의 거리는 너무나 가까운 것이며, 대중문화에서 신부님은 친근한 방식으로 밖에 그려질 수 없는 것이다. 해서 사람들은 그에게 더 호감을 느끼며, 단지 우리가 생각하는 신성하고 근엄한 신부님의 모습을 넘어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 같은 감정으로 고민하며 자신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그도 결국 같은 인간이고 친구임을 깨닫게 된다.
다른 한 가지는 스페인 바 문화다. 스페인 사람들은 식사 전이나 후에 바를 찾아 맥주나 커피를 마신다. 또한 타파스로 나오는 꼴뚜기 튀김이나 감자튀김을 먹으며 간단하게 요기를 하며 축구를 보거나 편안한 대화를 이어간다. 해서 이 영화는 교도소에서 사귄 라파의 바스크 친구를 어느 바의 주인으로 설정했고, 아마야가 처음에 자신의 아빠에게 라파를 소개시켜준 장소도 바였다. 이처럼 스페인 모든 영화에 ‘바’는 빠질 수 없는 요소이고, 바가 가지는 문화적 의미는 사람들이 가장 편하게 이야기하는 곳, 술이 곁들여진 가장 일상적인 공간으로서 관객에게 깊숙이 각인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문화적 특성은 자연스레 관객을 어떤 방향으로 학습시킨다. 하여 나 역시 영화를 보면서 이 두 가지 요소에 가졌을 수도 있는 반감이 애초부터 형성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스페인의 주된 문화로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관객은 스테레오 타입을 영화에서 학습하기도 한다. 이 <여덟 가지 성씨>의 감독 또한 각 주인공에게 지역에 대한 강한 스테레오 타입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스페인의 지역성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각은 감독이 의도한 영역에서 머무를 뿐이다. 다른 말로 어린 시절부터 이 부류의 영화를 본 남쪽 소년은 북쪽 소녀가 폭력적이라고 생각하고, 북쪽 소녀는 반대로 그를 게으름뱅이로 인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점을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다른 점을 제대로 쓰는 것은 매우 매우 어렵다. 문화적인 편견을 이기고, 스테레오 타임을 피하고, 역사를 수정하거나 축소하는 걸 피하고 타인의 다른 점을 깎아내리거나 사소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라는 이야기다. 작가들은 항상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제대로 쓰지?’ 나와 다른 문화적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상상해야 할 때는 더욱 철저히 냉정하게 여러 차례 질문해 봐야한다. 다른 것을 쓰려면 더 섬세한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어떻게 그 균형 감각을 찾을 수 있을지 잘은 모른다.”
-록산게이, <나쁜 페미니스트> 中-
이 책의 지은이가 말한 것처럼 다름을 올바르게 쓰는 건 매우 어렵다. 감독이 영화를 만들 때 주의해야할 부분이기도 하다. 영화라는 매체는 매우 조심스런 방법으로 사람의 감정을 다루기 때문에 관객들은 알아채지 못한 채로 감독이 심어놓은 문화와 스테레오 타입에 젖어 들어간다. 물론 이 영화의 감독은 오히려 ‘다름’을 통해 스페인에 존재하는 여러 스테레오 타입을 유쾌한 방식으로 타파하려고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영화 안에 존재하는 다름을 발견하려 했고, 그 결과 스페인 내에서 이 영화가 가지는 시사적 의미를 발견했다. 내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영화를 코미디의 영역으로 좁혀 아주 가볍게 ‘소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스페인 안에서 이 분리 독립 문제는 꽤나 심각하다는 것, 폭력적인 방법으로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스테레오 타입에 묶여 한 개인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 아마 감독이 이걸 말하려는 게 아니었나 싶다. 하여 아마야와 라파의 결혼이 깨져버렸지만, 아마야는 지극히 본인의 감정에 의지해 라파를 만나러 세비야로 떠난다. 문화의 벽이 사라지고 개인의 순수한 감정만이 남은 그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