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이곳은 겨울이다.
한국에 돌아왔다.
작년 7월 초에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갔으니 꼭 7개월 만의 귀국이다. 그동안 한국으로 돌아가는 친구들과의 이별이 익숙해질 만큼(절대 익숙해질 수는 없지만) 스페인에서 많은 날을 보냈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나의 순서가 돌아오니 그냥 슬펐다.
내가 맡았던 계절의 공기들, 시내로 가는 다리를 건널 때면 그 밑에서 뛰고 있던 사람들 심지어 그 순간 나는 더 눅눅해진 과거를 불러와 한밤에 미친 듯이 집에서부터 공원까지 뛰었던 기억도 끄집어냈다. 그날 저녁 무엇을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개운한 채로 평소보다 조금 덜먹었던 건 확실하다.
그녀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문득 그녀는 행복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번개 같은 깨달음과 함께 자신의 삶 전체와 세상을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뱃전에 몸을 기울이고 빠르게 흘러가는 물에 손가락을 담그려 했던 것이다. 작은 요트가 기울어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 사강) 中>
마지막 이틀은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사람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기도 하고, 또 희미하게 알고 있던 친구를 소개받기도 했다. 막상 마지막은 정신이 없어서 충분히 슬퍼하지도, 돌아갈 마음에 들뜨지도 않은 채 조금은 어정쩡하게 비행기에 올라탔다. 또 어느 저녁에는 선물을 비닐 두 봉지에 가득 산 다음에 자전거 손잡이에 하나씩 매단 채로 돌아온 적도 있다. 북적한 바에 부러운 시선을 거두지 못한 날이었으니 토요일 저녁일 테다.
며칠간 짐을 싸고 풀었다 다시 싸느라 귀국이 다가올수록 피곤해하던 동생이 있었다. 그 동생은 나보다 먼저 귀국했다. 함께 와인을 마시면서 '선물 사느라 일주일을 짐가방 무게와 씨름하는 건 곤란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이러고 있다니? 물론 끝까지 그러지 않겠노라고 남은 날까지 선물 사기를 미뤘다. 그러다 결국 나도 어딘가 다녀왔으니 남에게 무언가를 줘야만 한다는 압박을 못 이겼다. 그냥 빈손으로 밥시간에 도착한 다음, 1년 간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잘 지냈지?, 보고 싶었어"로 우리 사이를 시작하긴 왠지 정이 없어 보여서였다.
마지막 이틀을 좀 더 조용하게, 그동안 사랑했던 곳들을 살폈으면 좋았으련만 싶다. 토요일에는 해변에서 빠에야를 먹었지만 그곳은 너무 시끄러웠고, 음식은 지나치게 많았다. 결국 숟가락을 들어 무의식적으로 흩어진 밥알을 주워 모으다가 문득 이런 탐욕스러운 세상에서 배부름에 고통을 받고 있는 이기적인 나를 발견하고는 후식을 포기한 채 해변을 걸었다. 그 길을 따라 겨울 한 철 내내 문을 닫았던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였다. 오랜만에 셔터를 올린 이 가게는 뽀얀 핑크색 내부를 드러냈다. 주인아저씨는 다시 영업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하고 가게를 단정하게 정리 중이었다. 날씨는 22도까지 다시 올라갔다. 딸기의 가격이 떨어질 때쯤이면 해도 길어지고, 치렁치렁한 목도리나 기름진 머리를 가리던 털모자가 제자리로 차츰 돌아간다.
내 친구도 시험이 있어서 영국 여행 때부터 둘만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한 일주일 전쯤으로 돌아간다면 한 이주 전부터 선물을 사놨을 거다. 그러고는 엽서를 쓰고, 미니멀 라이프에 따라 물건을 버리며, 충분하게 슬픔을 털어냈어야만 한다. 일 년간 발렌시아에서 요긴하게 탔던 발렌 비씨(발렌시아 자전거)를 타고 바다까지 다녀오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
하여, 한국이다.
이제 멀리서 들려오는 수다 소리도 한 번에 알아듣고, 날씨는 좀 춥지만 카페에서 천천히 음료를 마시며 글을 쓸 수도 있다. 냉장고에 쌓인 김장김치를 보면은 괜히 파스타가 먹고 싶을 지경이다. 오랜만에 거실에서 담요를 덮은 채로 맘 편하게 텔레비전을 보는 건 또 얼마 만의 일인가. 말을 내뱉기 전 내 말을 곱씹을 필요가 없다는 건 '살아가는 것'의 큰 부담을 덜어낸다. 어제 고장 난 노트북을 반납하고 새것을 사며 내게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는 걸 서비스센터 아저씨에게 설명하는데 내가 이렇게나 빠르게 말을 할 수 있었나 신기했다. 한국말로 말이다.
대신 스페인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는 것도 있다. "보행자 도로에서는 언니가 몸빵(?) 하면 차가 알아서 멈춰"라는 동생의 말을 듣고는 좀 기가 찼다. 내 기억력이 나쁜지 스페인에 가기 전에는 어떻게 한국에서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넜는지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한 번은 스페인에서 당연하게 그랬듯이 보행자 도로를 건너는데 아저씨가 어찌나 쌩 달려가는지, 뒤를 따라오던 차도 그 아저씨만큼 빨리 달렸다. 괜히 마음이 삐쭉댔다. 또 마트 물가가 너무 비싸서 영양부족 브로콜리 한 다발이 2000원이었다. 작은 애호박은 900원(물론 한국에서 드디어 발견한 아주 단 호박고구마와 단호박은 가격과는 상관이 없었지만).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다시 수강신청을 했다. 이번에는 내가 주어진 것을 가지고 열심히 적응하고 배워보겠다고도 다짐한다. 이제는 친했던 친구들이 취업 준비를 한다며 연락수단을 없앴다. 친구들이 그 굴에서 나와 우리가 다시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한 3년은 걸릴 것 같다. 다행히 오늘은 아주 친한 친구가 주일에는 공부를 쉰다며 연락을 해와서 밥을 먹었지만, 그 친구와도 만날 수 없었다면 한국이 조금은 야박해 보였을 거다. 고등학생 때는 친구와 컵라면 하나를 먹으면서도 그렇게 풀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들의 얼굴조차 보기가 힘들다. 해도 성공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너무나 초라하게 본 나머지, 괜찮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실 자격도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사실 자신만 모를 뿐, 모두 다 빛나는 존재들이니깐.
나도 스페인에서 일과 진로에 대한 계획들이 생각보다 더 복잡해졌다. 떠나기 전에는 한국 돌아와서는 '달릴 일'만 남았을 거라 믿었는데,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고등학교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 정말로 나와는 맞을까 자꾸 의심하게 된 것이다. 또 나는 아직 사회로 나갈 준비가 안됬다는 생각은 확실해졌다. 실제로 그곳은 생각보다도 더 차가울 테고, 기상-출근-퇴근-취침-야근, 야근에 약간의 여름휴가를 더한 연봉 높은 일이 정말 나 스스로를 만족시킬까도 싶다. 그것을 견뎌내면서까지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데, 자라온 게 한국이라 주위에서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하는 많은 이들의 기대가 어쩔 때는 왜 저렇게까지.? 할 정도로 심하게 불편하기도 하다.
어쨌건 한국, 이곳은 한 스페인 선생님의 표현처럼 많은 압박이 있는 곳인 것 맞지만, 내가 그동안 자라고 배운 곳이다. 1년 동안의 그 많은 날들에 느꼈던 새로운 깨달음을 잊지 말아야지. 그래야 또 봄이 오고 꽃이 필 테니깐. 딱딱한 뇌로 살아오던 한국에서의 '나의 완벽한 미래의 자화상'이 조금은 부끄럽다. 아직 한국은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