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이야.
지난해, 나는 스페인 남동쪽에 있는 발렌시아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그곳에 도착한 첫날 공항에서 내가 알고 있는 스페인어는 정말 '올라(hola : 안녕하세요)' 인사말 하나 뿐이었다. 난 종이에 적힌 주소에 있는 집을 찾아가야 했는데, 아무것도 몰라서인지 오히려 매우 용감하고 당당했다. 장바구니를 든 한 아주머니가 지나가는 찰나, 난 아주머니에게 가서는 집주소를 보여주고 어찌저찌 집을 찾아달라고 했던 것 같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스페인어 한 마디도 못하는 내가 걱정되서였는지 집 앞까지 동행해주셨고, 벨을 눌러 문이 열린 후에야 가던 길을 가셨다. 생각지도 못한 친절을 베푸신 아주머니 덕분일까. 나는 아는 이가 아무도 없던 그곳에서 첫날부터 기분 좋게 잠에 들었다.
나는 조금은 성급한 면이 있는데, 이 성격은 새로운 것에 적응할 때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별 다른 이유 없이 나는 외국 생활을 해보고 싶었다. 해서, 말도 통하지 않고 가족들과도 매우 멀리 떨어진(물론 고등학교 때부터 쭉 기숙사 생활을 했지만) 땅덩어리에 있었지만, 매일매일이 축제 같았고 마음이 붕 떠있었다. 학원에서 만난 노르웨이 친구들은 늘 어딘가에 갈 때면 나를 불렀고, 우리는 해변에서 일출을 보며 여름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오자고 약속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한 노르웨이 친구의 생일날에는 아침부터 몰래 크레페와 샴페인을 준비해 생일을 맞은 친구를 깨우기도 했고, 어느 토요일에는 예쁘게 차려입고 시내로 나가 우아하게 빠에야를 먹었다. 근처에서 들려오던 아코디언 연주에 맞춰, 적당히 와인에 취한 채로 난 그 친구들과 얼마나 수다를 떨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내가 처음 브런치에 쓴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한동안 스페인 생활이 외롭고 서글펐다. 가끔 길을 지나가면서 몇몇 스페인 사람들이 나를 니하오(중국어로 '안녕'), 치니따(스페인어로 '중국 여자 아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런 일을 겪은 날이면 방에서 난 꽤 오랫동안이나 앓았고, 며칠간은 스페인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는 오후 7시~9시 무렵에는 또 인종차별을 당할까 테라스가 쭉 펼쳐진 길을 피해 다른 길로 돌아가기도 했다. 지금 와서는 '왜 그때 한마디 한마디에 그렇게 상처를 받았을까' 후회하지만, 작년 이 문제는 나를 꽤나 괴롭혔다. 나는 생김새가 다른 데에서 오는 소외감이 너무 싫었고, 이 '인종'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해야 할 지도 잘 몰랐다. 유학생활 3개월을 주기로 요상하게 향수가 찾아왔다. 어느 날은 가족이 너무나 보고 싶었고, 이렇게 유학생활을 하는 것이 맞는지 가끔은 불안할 때도 있었다.
물론 내게도 큰 도움이 되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스페인 생활을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났을 때 우연히 스페인 친구가 생겼다. 불안하고 매우 흔들리던 시기였다. 딱히 마음이 맞는 한국인 친구를 못 만났고, 가끔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 손해를 볼 때도 종종 있었던 시기. 그때 스페인 친구는 늘 내 입이 되어주었고, 아플 때면 과제도 내려놓고 약을 지어올 정도로 날 잘 돌봐줬다. 또 여름이면 난 스페인 친구의 부모님의 별장이 있는 페니스콜라에 가서 아침 조깅도 하고, 땀을 씻으러 바로 앞에 있는 바다에도 갔다. 아이스크림을 물고 밤에 천천히 걷다가 지루해질 쯤이면 바르셀로나나 살라우에 가서 여독을 풀고 왔다. 늘 내가 가진 고민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말이 잘 안 통했지만 어쩐지 대화가 잘 되던 사람.
스페인의 가장 큰 명절인 성탄절 때는 친구의 가족들과 함께 2주간 맛있는 타파스와 와인을 즐기고 선물도 교환했다. 스페인 친구의 할머니는 내가 올 때마다 뭐가 먹고 싶은지 물어본 뒤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또르띠야 데 빠따따스(tortilla de patatas : 달걀과 감자를 넣어 두껍게 부친 케이크)'를 준비해주셨다. 동방박사가 오신 날에는 따뜻한 잠옷을 선물해주시며 가족과 떨어져서 명절을 보내고 있는 나를 걱정하셨다.
가끔은 한국 생각이 간절하다가도, '경쟁'이라는 잣대를 들이밀지도, 나에게 무엇을 강요하지도 않는 스페인 생활을 마주할 때면 문득 '이 나라라면 한 번 살아봐도 좋겠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무턱대고 그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스페인에 오기 전, 한 언론사에서 인턴기자로 활동했었고 아직 졸업까지는 1년이나 남은 상태였다. 어느 측면에서는 매우 즉흥적이기도 한 나지만, 현재에 취해있다 보면 나중에는 문득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놓칠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때가 되면 올 줄도 알아야 한다"는 인턴 기자 시절 내가 존경했던 선배의 말이 생각나 나는 예정대로 귀국했고 다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힘들었다. 전에는 한 번도 '휴학'이란 걸 해보지 않아서, 대학교에는 함께 다니는 친구들이 있었다. 수업도 함께, 점심도 함께, 어느 날은 카페에서 신메뉴를 먹어보기도 하고, 지방 출신 대학생의 로망인 한강에서 치킨 먹고 자전거 타기 등의 위시리스트를 내 친구들과 꼼꼼히 해나갔다. 가끔은 '이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대학생활은 친구를 빼곤 설명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학교에 공부하러 간 기억보다는, 맛있는 거 먹고 재밌는 거 보고 새로운 곳에 갔던 추억들이 빼곡하다.
다시 돌아온 학교에는 친구들이 없었다. 이미 졸업을 한 친구도 있었고, 그중 다수는 취업 준비로 연락이 끊겼다. 남자 동기들은 제대 뒤 복학을 했으나, 난 1학년 때부터 늘 여자 친구들과 다니곤 해서 왠지 모르게 낯선 이들과 함께 있는 게 어색해 그 자리를 피하곤 했다. 큰 맘먹고 공부 한 번 해볼까 싶다가도 금세 '이 공부를 왜 해야지?', '과연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이 공부일까?' 망설여진 적도 있었다.
그래도 주어진 일에는 성실하고 싶어 전보다 더 이를 악물고 했다. 또 1년 간 스페인에서 생활하며 현지 친구들 덕에 한 3년은 스페인에 산 효과를 보아, 스페인어 과외를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래저래 고민이 많았는지, 몸도 마음도 약해졌고 어느 날은 아침 과외를 마치고 교회를 가다가 지하철 출구에서 픽 쓰러졌다.
스페인 친구들과는 정말 자주 영상통화를 했는데, 한동안은 스페인에서의 일 년과, 그때 만났던 사람들이 너무나 그리워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이 진부하긴 해도,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그곳이 그리워졌는지 모르겠다. 아마 몸은 한국이지만 마음만큼은 그곳의 봄을 그리워하고 있었을지도.
나의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현실로 만든다는 것. 덕분에 나는 교환학생을 통해 4학년 1학기를 다시 스페인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것도 스페인의 옛 수도인 톨레도에서 말이다.
나름대로 힘든 한 학기였지만, 이 학기만 끝나면 또다시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에서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난 한 학기를 잘 버틸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본론이다. 올 8월, 나는 다시 스페인에 왔다. 학기가 시작하기까지 한 달이 넘게 남아있었다. 7월에 오랜만에 본 스페인 친구는 나와 가족들을 보러 한국에 놀러 왔는데, 한 달 뒤에 나는 스페인으로 가서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스페인 여름을 만끽했다.
여름 별장,
삼촌 할아버지가 사시는
산세바스티안에서 열리는 여름 축제인
'세마나 그란데
(semana grande : '큰 주간'이라는 뜻으로 산세바스티안의 여름 축제 공식 명칭이다. 스페인은 여름에 한 주마다 도시들이 번갈아가며 각 기 다른 이름으로 축제를 연다)',
스페인 가족과의 갈리시아 여행,
내가 공부했던 발렌시아로 돌아가 보기,
가끔은 파리, 이탈리아로 여행,
해변에서 읽는 종이책,
저녁에 마시는 와인 두 잔,
깨끗한 하늘,
신선한 과일 그리고 해산물
...
이렇게 금방 여름이 가고 난 톨레도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발렌시아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내가 교환학생으로 스페인에 오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한 적이 있다. 어학연수는 사실 돈을 내고 어학원을 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심적으로 부담이 됐다.
'더 잘해야 할 텐데'
'이 정도면 될까?'
경쟁사회에서 자란 나는 누구보다 더 잘하는 것이 최고라 배웠고, 그렇지 않으면 자연스레 나는 불행할 것이라는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여 스스로를 궁지로 몰기도 했는데, 딱히 열심히 공부하진 않았어도 늘 마음속에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못된 압박이 있었다. 하지만 교환학생을 오면서는 이런 마음들을 다 내려놓고 이제는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만나보기로 했다.
빠른 스페인어로 진행되는 수업, 교수님의 배려로 스페인 친구들과 함께 하는 조별과제, 40분 떨어진 마드리드로의 외출, 제철 재료로 만드는 맛있는 점심, 빵 위에 토마토와 올리브유를 뿌리고 라테를 곁들인 스페인식 아침, 주말이면 어느 채널에서나 볼 수 있는 영화, 세계 각 국에서 모인 친구들...
한국에서는 과제를 하고 사는 게 바빠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는 의미에서 시간이 빨리 갔다면, 이곳에서는 삼시세끼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고 쉬엄쉬엄 사느라 하루하루가 참 빨리 지나간다. 아침에 신문을 보고, 점심에는 외국 친구들과 놀다가 저녁에 운동을 한 뒤 와인을 마시다 보면 금세 밤이 깊어진다.
인종차별의 문제에 있어서도 좀 쿨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나 혼자 끙끙 앓다가,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에게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하는 소극적인 태도는 버렸다. 나중에 이 주제를 한 번 다뤄볼 예정인데, 짧게 말하자면 얼마 전에는 버거킹에서 나를 향해 인종 차별하던 여직원에게 당당히 찾아가 '이건 아닌데요.'하고 저항해본 적도 있다. 또 한 사람이 나에게 차별을 했다고 모든 스페인 사람이 나를 차별적으로 대하거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이렇게 나는 조금 더 튼튼해지고 덜 삐죽삐죽해졌다.
지난 3개월 간의 생활을 매일 글로 남겨볼까도 했으나, 이제 어느 정도 스페인 생활에 적응한 지금부터가 글을 남길 수 있는 시점인 것 같다.
내 눈에 선명히 보이는 것들,
스쳐 지나가는 것들,
한 달에 한 번씩 가는 유럽 여행,
타국의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
그 외의 내가 기억하는 것들...
이 모든 것들이 제 브런치 주제가 될 예정입니다.
혹시 스페인 생활에 대해 해드렸으면 좋겠는 브런치 이야기들, 알려주신다면 열심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