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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Aug 03. 2022

헤어질 결심

가끔 그런 후회를 한다. 어떤 서랍은 열지 않았어야 좋았을 것이라고. 그 안에 봉인된 미움과 증오, 의심과 같은 추악한 괴물이 뒤따라 나와서다. 수채화 같은 추억은 지워 놓은 채. 더욱이 그게 이별에 관한 것이라면 말이다.


군에 복무할 때 일이다. 상병에 진급했을 무렵 부대에 사이버 지식 정보방이 생겼다. 이 직설적인 데다가 세련된 구석이라고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이름의 방에는 컴퓨터 서너 대가 있었다. 몇몇은 주말이면 하릴없이 미니 피시방에 붙박혀 있었다. 대개 스포츠 뉴스를 봤고 때때로 먹고 싶은 음식을 검색했다. 아니면 목적지 없이 가상의 세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혹은 남의 싸이월드를 구경했다.


그 애 싸이월드에 웬 남자의 댓글이 있었다. 일상적으로 안부를 묻는 말이었던 것 같다. 글쓴이가 남자라는 사실 말고는 그 짧은 문장에서 아무런 혐의점도 잡아낼 수 없었다. 잠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 애는 잘 사는 것 같았다. 내가 곁에 머무르기 전에도 이렇게 잘 살았겠지, 싶었다. 잠시, 아주 잠시 그 애 곁에 살았을 뿐이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우주의 먼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두 번 다시 오지 않겠다고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창을 닫으려고 했다. 정말이지 그때라도 창을 닫았어야 했다.


그 남자가 가시처럼 걸렸던 것이다. 가시인지 아닌지 두 눈으로 확인해야 의심이 가실 것 같았다. 혹여 의심이 여지없는 사실로 드러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얼결에 그 남자의 싸이월드에 입장하고 말았다. 거기에는 그 애 댓글이 하나 달려 있었다. 바로 나에게 이별 통보를 하기 한 달 전에 남긴 것이었다.


제대하려면 얼마 남지 않았지. 시간 참 빨리 간다.


대충 이런 안부의 말이었다. 문제는 그 남자의 이름에서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는 것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 남자는 그 애의 전 남자 친구였다. 그리고 현 남자 친구이기도 했다. 순간 헤어지기 한 달 전 했던 불편한 데이트가 떠올랐다.


그날 그 애는 유달리 피로해 보였다. 무슨 일인지 그전보다 웃음이 부쩍 줄었고 말수도 적었다. 내 우스운 말에는 실웃음을 지었고, 걱정하는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저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모양이라고 여겼다. 그날을 복기해 보니 잃어버린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어쩐지 그 애는 내 손을 피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럴수록 부러 손깍지를 끼려고 했는데 그 애의 손은 마른 모래처럼 스르르 빠져나갔다. 단지 내 손이 아니라 내 인생에서 퇴장하려고 한 걸 그때는 까맣게 몰랐다. 그즈음 그 애는 헤어질 결심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남자의 싸이월드를 보기 전후로 달라진 건 없었다. 그 애는 내 곁을 떠난 지 오래였고 여전히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달라진 건 내 마음뿐이었다. 괴물이 그 애를 향한 미련을 집어삼키고 미움과 증오만 텅 빈 운동장에 덩그러니 남겨 놓은 것이다. 그날 나는 싸이월드를 삭제했다. 그것 말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그것만이 나의 안온한 세계를 지킬 수 있는 길이었다. 그제서야 헤어졌다는 게 실감이 났다. 어느 이별 노래 가사처럼, 한 번도 안 했던 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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