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도망치듯 출발했다. 오전에 말짱히 출근했다가 반차를 낸 것이다. 대부분 여름휴가를 낸 터라 그나마 눈치를 덜 봤다. 운전대를 서울 방향으로 틀고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원래 일을 할 때에는 계획적인 사람인데 여행을 갈 때에는 무계획적인 사람이 되고 만다. 아무래도 나에게 여행은 성취의 대상이 아니라 치유의 수단인 듯하다.
만성 질환자들이 약을 주기적으로 복용하는 건 체내 약물 혈중 농도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해야 해서다. 약물 혈중 농도가 낮아지면 약효도 덩달아 떨어진다. 즉,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약은 병을 뿌리 뽑지 못하지만 무성하게 자라지 않게 한다.
내 여행도 약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약발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지만 적어도 구멍 난 마음에 임시로 땜질을 해줄 수 있어서다. 언제 다시 마음이 해질지 모르지만 말이다.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출발하기 전에 대학 동기인 K에게 카톡을 보냈다. 지금 여기를 벗어나는 것만으로 마음이 더이상 뾰족해지진 않겠지만, K와 실컷 수다를 떨면 빨갛게 오른 부기도 조금 가라앉을 것 같았다. K는 기자인데 한창 바빠서 그런지 카톡창 메시지 옆의 1은 사라지지 않았다. 천안을 지나고 있을 때 핸드폰 창에 말풍선이 떴다.
“아니 없어. 서울 왔어?”
우리는 을지로 4가에서 만났다. K는 힙지로에 와서 그런지 조금 달뜬 모양이었다. 스스로 가이드를 자처하며 앞장서 걸었다. 작은 마이크가 달린 휴대용 스피커만 있으면 영락없는 관광 가이드였다. 골목길로 뒤따라 들어갔다. 색이 바랜 간판에는 철공, 조명, 인쇄 따위의 업종이 쓰여 있었다. 세월의 풍파를 맞았는지 군데군데 닳거나 덧칠한 흔적이 눈에 띄었다. 일일 가이드 님이 건물 한쪽의 계단 입구를 가리켰다. 아무런 간판도 없었다. 모르고 걸으면 지나치기 십상인 곳이었다. 저런 데 계단을 올라가면 번듯한 카페나 주점이 있다고, 가이드 님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거미줄 같은 골목을 지나서 세운 상가를 거니는데 K가 핀잔하는 투로 물었다.
“그런데 너는 무슨 휴가를 서울로 오냐?”
어떤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닌 걸 알았지만 나는 구태여 이렇게 답했다.
“서울에는 자극을 주는 요소들이 많잖아. 여기 힙지로처럼.”
나는 자극, 변화, 재미, 성장과 같은 단어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물을 잔뜩 머금은 빨래처럼 축 처지는 날, 탄력과 활기를 불어넣기에 서울만한 곳이 없는 거다. 오늘만 해도 힙지로에 온 덕에 간판 없는 가게를 연 주인장은 어떤 사람일지, 전자왕국 지층 위에 새로 지은 세운 상가가 그간 어떤 우여곡절을 겪었을지 머릿속에 그리게 되지 않았는가.
서울 관광 마지막 코스는 내가 앞장섰다. 우리는 청계천을 따라 걷다가 소라탑 맞은편 블루보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는 콜드브루, K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K가 블루보틀에는 처음 온 거라고 하여 부러 뉴올리언스를 권했는데, 내 말이 소음에 묻힌 모양이다. 콜드브루를 빨대로 빨았다. 덜 익은 과일처럼 시큼하면서도 한편으로 커피의 쌉싸름한 맛이 났다. 동네 카페에서는 맛보지 못한 풍미였다. 이 맛에 서울에 오지.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