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 #여행 #밥벌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내방 책상에 탑처럼 쌓아 놓은 책들이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처럼 보였다. 그러다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눈꺼풀에 추를 매달아 놓은 것 같아서다. 앞이 새카매지니까 선택지가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심연으로 가라앉은 기분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일에는 도무지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선택지는 늘 빤하다. 도서 구입 아니면 발라드나 댄스곡 청음, 혹은 여행이다. 셋이 오래된 슬라이드처럼 지나갔다. 언제나 그랬듯 여행에서 스톱을 외쳤다. 그 길로 대학 동기이자 도망 동반자인 K에게 톡을 보냈다.
기자를 할 때의 일이다. 무면허 오토바이 배달 사고를 취재하느라 치킨, 피자 가게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마침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스쿠터에 시동을 거는 아르바이트생을 만났다.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해 주는 조건으로 인터뷰를 했다. 학교에 나가지 않는 남학생이었는데 학생이라고 불렀다. 나는 면허 없이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를 물었다. 남학생은 잠깐 먼산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답했다. 바람 맞는 기분이 좋아서요.
한동안 멘트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그 학생이 되어 봤다. 학교에서는 골칫거리였겠지만 스스로는 좁은 벽장 속에 갇힌 듯 가슴이 얼마나 갑갑했을까. 걷는 속도보다 빠른 속도에 몸을 실은 채 바람을 맞으면서 바람에 걱정을 흘려보내고 싶었겠지. 학생에게는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하는 게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가슴이 먹먹할 때면 차를 몰고 가까운 곳으로 때로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차창을 내리고 한 손으로 바람을 느끼면서.
그날 오전 사무실에서 계약서를 살피는데 K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 K의 음성은 평소보다 낮았다. 순간 전날 밤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는 걸 직감했다. 내가 “어제 회식이라도 했어?”고 묻는데, K는 “나, 회사 그만둘까 봐.”라고 답했다. 예상 답안지에 없는 답변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어찌나 한숨이 깊고 진한지 담배 연기처럼 허공에 흔적이 남을 것 같았다.
전화벨이 울린 탓에 낮잠에서 깼다. 방구석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다가 그대로 잠에 든 모양이다. 시계는 오후 4시 40분께를 지나고 있었다. 핸드폰 발신자는 K였다. K는 방금 일을 끝냈노라고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로 갈지 정했냐고 물었다. 그 길로 녀석의 손을 잡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하울처럼 어디든지 우아하게 날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풍경은 딱했다. 우리는 서울과 대전의 중간 도시에 대하여, 파도치는 강릉 바다가 주는 청량함에 대하여, 러시아워의 고속도로에 대하여 토론했다.
하지만 가열찬 토론의 결론은 낯선 여행지가 아니라 익숙한 방이었다. 더 이상 여행이 뾰족한 문제를 둥글게 깎아주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말이 여행이지 속뜻은 언제나 도망이었으니까. 언제까지 본능이 이끄는 대로 대응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둘 사이 대화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듯 붕 떴다.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녀석이 돌연 화제를 바꿨다. 낯선 도시에서 만나기로 의기투합했더라면 포장 음식을 사이에 두고 나눴을 이야기였다.
K는 당장이라도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 했다. 어떤 일이 녀석의 몸통 한가운데 커다란 구멍을 낸 듯 하였다. 구멍을 기워줄 용한 재주가 내게는 없는 터라 가만히 K의 말을 들었다. K는 한참 동안 말을 토했다. 일이 벌어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탓이리라. 여진이 녀석을 흔들고 있었다. 적어도 더 이상 심하게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줄 책임이 내게 있었다.
나는 섣불리 결정하면 후회할 일을 만들 수 있으니까, 앞으로 1년이든 2년이든 3년이든 간에 퇴사 준비를 해 보라고 권했다. “3년이라고?” K는 화들짝 놀란 듯 되물었다. 당장 눈앞이 지옥도일 K에게는 1년도 영겁이라는 걸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거다. 어쩔 수 없이 나는 K의 다짐이라도 받아 놓으려는 듯 반년이라도 고민해 보라고 단단히 일러뒀다. K도 일단 알겠노라고 답하고 통화를 마쳤다.
나는 축축한 방으로부터, K는 끔찍한 회사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도 도망치지 않았다. 책상에 탑처럼 쌓인 책들은 그대로 있었고, K는 해야 할 일을 어제처럼 마쳤다. 도망치지 않고 일상을 붙잡고 있는 우리가 새삼 대견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