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성격 #인생
"네가 그랬잖아?"
"내가?"
타인의 눈에 비친 나는 낯설다. 이국에서 맞는 아침처럼. 오랜만에 만난 동네 친구 H는 오래전 얘길 꺼냈다. 급식 메뉴에 자주 실망하고 축구공에 푹 빠졌던 중학생 때 일이다. 녀석은 내 머릿속에 흔적조차 남지 않은 일의 원형을 눈앞에 재현했다. 마치 객석에서 나를 24시간 촬영한 관찰 영상을 스크린으로 보는 기분이었다. 입을 반쯤 벌린 채 중간중간 흠칫거리면서.
H 이야기는 이랬다. 우리가 가까워진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내 기억 속에서 H가 최초로 등장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여서 어리둥절했다. 아마 우리는 2~3년간 데면데면한 사이였던 듯하다.) 어느 날 하교 시간이었는데, 다들 떠나고 텅 빈 교실에서 또 다른 친구 A가 청소를 하고 있었단다. 그날 A는 청소 담당이었거나 뭔가를 잘못해 벌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내가 A를 도와 청소를 마치고 같이 하교했단다. H는 그 장면을 보고 나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고 했다.
이전까지 H에게 나는 그저 까불거리고 수다스러운 아이였다. 그러면서도 시험 성적은 곧잘 받았으니, 한마디로 얄미운 녀석이었다. 그 사건으로 H는 나를 인식하는 카테고리에 착함이라는 항목을 새로 만들었다. 어라, 이놈 착하네. 어어, 초코파이 같은 구석도 있는 걸. 우리는 먹이 한지에 스며들듯 서로의 성공담과 실패담과 연애사를 차곡차곡 쌓아 갔다.
스물한 살 겨울이었다. 나는 대학교 2학년 기말고사를 마치고 부모님 집에 내려와 있었다. 군 입대 두 달 전이었다. 그때 나는 오래 누워 있었고 이따금 서 있었고 그보다 자주 지나간 일들을 곱씹었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내 결혼식에 축하하러 올 사람들이 누구일지 떠올려 봤다. 당시 그나마 교제하던 여자와 헤어진 마당에 구태여 무용한 상상을 한 연유를 모르겠지만. 내 관계는 번잡하지 않아서 그런지 열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는 H를 포함하여 몇몇이 있었는데, 뜻밖의 공통분모를 발견했다. 하나같이 친구들이 내게 먼저 다가와 우정이 싹튼 것이다.
당시 나는 관계에서 다소 소극적인 스스로를 되돌아보기 바빴다. 하지만 H의 말을 듣고 공통분모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다. 내게 손을 내민 친구들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그중에는 착함도 있고 말이다. 험난하고 지난한 인생을 걸어가는데 마음이 통하는 벗은 든든한 힘이 되어 준다. 그러하기에 착함도 무기가 될 수 있다. 좋은 벗과 인연을 맺는 계제가 되어서다.
몇 해 전 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은 이승기 가수의 말에 웅숭깊은 울림을 받았다. 이승기는 한 도전자의 무대를 이렇게 평했다. "연예인은 착실한 게 마치 손해인 거 같았다. 착실함보다 끼가 더 중요하다는 말을 들어 성실도 끼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착실하고 성실한 끼를 내보이는 모습에 제가 다 고맙다."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졌다. 부모님 보기에 멋쩍어 채널을 돌렸다.
한때 나는 모질지 못한 성격 탓에 손해를 보고, 때로는 하이에나들의 표적이 됐다고 자책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을 쳤다. 착함이 무용하다고 가슴에 새겼다. 약삭빠르고 독하지 못해서 당했다고 단정 지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별다른 끼가 없는 와중에도 착함으로 맺어진 인연들 덕분에 어두운 터널을 걸을 수 있었다. 이승기 가수도 성실함으로 치열한 연예계에서 정상에 섰고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착함도 성실함도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