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참 진 맑을 아 Sep 16. 2020

우산 대신 우비를 입고 출근을 했다.

최근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경험은 우비를 입고 출근한 것이다. 주말 내내 집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내다가 일요일 밤이 되어서야 다음날 일기 예보에 종일 폭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2개의 우산 모두 다 회사에 내팽개쳐놨고 집에는 우산이 없으며 오롯이 홀로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1인 가구인 나에게는 누군가 내어주는 여분의 우산은 꿈꿀 수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쿠팡이라는 좋은 조력자가 있고 새벽 배송이라는 눈물 나게도 감사한 서비스가 있어서 주문 가능시간 3분 전에 결제를 완료하고 행복한 기분으로 잠에 들었다. 그러나 폭우로 배송이 지연돼서 7시에 도착하지 않은 우산 덕분에 나에겐 여전히 우산이 없었고 이럴 때 재택근무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현실은 지하철 플랫폼에 도착하는 8시 23분 도봉산행 열차를 타고 출근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지 불현듯 저번에 여행 도중 샀었던 우비가 생각이 나서 옷장을 뒤져서 찾아냈다. 월요일이고 재택근무하는 사람이 많을 테니 지하철에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며 그렇게 나는 집을 나섰지만 정반대로 이상하리만큼 사람이 많았고 강남 한복판에서 나는 그렇게 투명 우비를 입은 채로 뚜벅뚜벅 걸었다.


이 경험을 지인들에게 말하니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다. '나라면 지각을 하더라도 지하철 역 안에 편의점에서 우비 버리고 우산 샀을 것이다.', '아파서 회사 못 간다고 급 연차 썼을 것이다.', '택시 타고 출근했을 것이다.' 등 나는 생각해보지 못한 견해들이 쏟아져서 신기했는데 더 신기한 것은 그 후 하나같이 '너니까 우비 쓰고 출근할 수 있었겠다.'로 모든 것이 귀결되어서 새삼 놀라우면서도 재밌었다. 나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떻길래 남들은 우비를 쓰고 출근할 수 있는 사람으로 특정 지을까가 궁금해졌다.


희망을 품으면 달라질 거라는 확신이 드는 상황이면 포기를 하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반대의 상황이면 곧잘 현실을 빠르게 인정하고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포토샵 작업을 하다가 응답 없음으로 창이 꺼지는 경우 다시 그 파일이 살아날 희망은 없기에 빠르게 내가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의연하게 재 작업을 시작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우비를 입고 출근한 것도 나에겐 우산이 없고 출근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우비라도 있는 게 어디냐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나를 특별한 색깔로 봐준다는 것은 어찌 되었든 이롭고 뜻깊게 느껴진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 되지만 갑자기 단추가 빠지는 것처럼 내 곁을 떠나갈 수 있는 것도 인연이다. 나에게는 그러한 역경을 겪지 않고 내 곁에 끝까지 남아주어서 긍정적으로 바라봐 주는 이들이 있다. 

작가의 이전글 어둠 속에서 순댓국을 먹어보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