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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당동붓다 Jun 12. 2020

기다림

종로에서 을지로로 가는 길목에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오목집이라는 족발집 벽면에 크게 이런 문구가 쓰여있다.

'서둘지 마세요. 서둘면 서툴어지고 서툴면 틀어집니다. 당신은 느린 사람일 뿐, 늦는 사람은 아닐 겁니다.'  

그 글귀를 볼 때마다 무릎을 탁 친다.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것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아이를 만나고 만지기까지 많은 기다림을 견뎌야 했고, 태어나서부터는 아이의 속도로 잘 자라기를 기다려야 했다.


처음에는 아이를 키우는 것을 남들이 정한 속도에 맞추려고 했다. 엄마는 응당 완모를 해야 한다는 기준, 하루 120ml라는 밥을 먹여야 하는 기준, 저녁 8시에 재워야 한다는 기준, 엄마가 직접 이유식을 해줘야 한다는 기준, 반찬은 3개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기준. 모두가 좋다고 하는 그 수많은 기준들을 하나도 맞추지 못한 나의 육아는, 나를 끊임없이 자괴감에 빠지게 했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길래, 남들처럼 모유가 많이 나오지 않을까. 내가 모유를 많이 주지 못했기 때문에 내 딸은 다른 아이들처럼 밥을 많이 안 먹는 것일까. 왜 내 딸은 내 친구 아들처럼 8시부터 기절한 듯 잠들지 못하는 것일까. 혹시 아이를 임신했을 때 새벽까지 일하고 과제를 해서 그런 것일까. 내가 일하는 엄마이기 때문에 아이의 정서가 불안정한 것 아닐까. 끊임없이 남들과 나를 비교하고, 또 아이를 비교했다. 나는 비교의 굴레 속에서 살았고, 매사에 피곤했고, 미안했고, 짜증 났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저녁이었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음식을 먹기 싫어하는 딸을 어르고 달래 저녁을 먹이고, 자지 않고 울며 떼쓰는 아이를 재우기 위해 거의 탈진한 채로 아이를 재우고 있었다. 그때 문득,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나는 대체 누구를 위해 먹기 싫어하는 아이를 억지로 먹이고, 자기 싫어하는 아이를 억지로 재우는가. 이렇게는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육아서적,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 카더라 통신 그 모두를 멀리하기로 했다. 아이가 아프면 삐뽀삐뽀 119 하나만을 봤고, 고민이 되면 남편이 찾아주는 논문만 봤다. 나는 얼마큼 먹여야 한다, 무엇을 먹여야 한다, 언제 자야 한다 그딴 기준들을 모두 무시하기로 했다. 나는 동아가 배가 고프면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졸리면 잠을 잘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동아의 속도와 동아의 기준을 알아가고 최대한 맞추기로 했다. 우리는 가족이고 적어도 20년은 같이 붙어살아야 하니,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들은 행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배가 고프면 같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고, 서로 다 먹었다 싶으면 상을 치웠다. 아이가 잠을 자지 않으면 애써 재우지 않았다. 둘이 한바탕 목욕을 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창문을 활짝 열고 놀고 놀다 잠이 들었다. 어느 날은 일찍 잤고, 대부분의 날은 늦게 잤다. 심지어 어른의 대화를 하고 싶은 날이면 내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하고, 아기띠를 한채 술을 마시고 놀았다. 동아 때문에 내 삶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고, 굳이 아이에게 '엄마가 너를 위해 인생을 희생했다'는 짐을 지워주고 싶지도 않았다. 동아도 내가 엄마가 되는 것을 기다려주었고, 내 친구들을 받아들여주었다.


그렇게 동아는 나와 함께 하는 삶 속에서 천천히 자신의 속도를 찾아갔다. 5살이 되었을 때부터는 옆에서 재워주지 않아도 혼자 침대에서 잠을 잤고, 소위 말해 '남들처럼' 밥을 잘 먹기 시작했고, 키가 컸고, 9시면 잠이 들었다.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속도로 잘 자라주었다.


하지만 5살이 되니 이제 새로운 유형의 기준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영어유치원에 보내야 한다더라, 한글은 6살에 떼야한다더라, 프랑스식 미술교육을 시켜야 한다더라, 미디어에 노출을 시키면 안 된다더라, 이래야 한다더라, 저래야 한다더라. 한번 겪어본 터라 이번에는 좀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공부라는 건 평생에 걸쳐 꾸준히 해야 하는 것이니까, 7살까지는 그 부담과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다.


 딸은 7살에 여름에 한글 공부를 처음 시작했지만 이제는 나에게 시를 선물해준다. 파닉스라는  듣도 보도 못했지만, 8 봄에 처음 만난 외국인 선생님과 둘이  시간씩   . 학원에 다니지는 않지만, 미술시간에는 굉장히 창의적인 창작물을 만들어낸다.


나는 믿는다.

아이는 자신의 속도로 잘 자라고 있음을.

그 속도는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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